섹슈얼리티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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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방법론, 인식론

흑인 페미니즘 사상, 콜린스의 교차성/인식론

플루키 2019. 3. 27. 16:51

콜린스는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적, 정치적 조건, 특히 백인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지식이 체계적으로 흑인 여성의 존재를 주변화해 왔음을 밝히고, 흑인 여성의 경험을 통해 사회비판이론으로서 흑인 페미니즘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이때 흑인 여성의 ‘경험’은 인종과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이 맞물려 작동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종속된 지식’을 발전시킨다. 콜린스는 억압의 질서가 단지 종속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저항적 실천과 지식 또한 추동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34).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흑인 페미니즘이 흑인 여성의 개별적 혹은 집단적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주류 사회(과)학적 논의에서 진리 또는 지식을 입증하는 것은 연구자의 주관이나 감정을 배제한 객관성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콜린스는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성 등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지식인’을 강단 학자에서 확장함으로써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토대이자 강점이 되는 ‘입장(standpoint)’의 중요성을 강조한다(38). 여성에게 강요되는, 혹은 흑인에게 부여된 규범과 고정관념과 불화하는 흑인 여성의 일상적 삶과 실천은 그 자체로 ‘객관적 지식’이나 ‘개념’의 질서를 해체한다(45). 이는 한편으로 억압의 질서가 구조적, 제도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실상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주는 작업이며, 동시에 이와 같은 억압의 질서가 실제 삶에서 분리되기보다는 맞물려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맞물려서 작동하는 권력체계의 억압적인 힘”(7)에 흑인 여성이 대응하는 방식도 저마다 상이한데(63), 콜린스는 따라서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그러므로 진정한 경험으로 여겨지는 본질적이거나 원형적인 흑인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65). 오히려 이질성을 통합하는 반본질주의적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인식론적 힘이 부분적인 지식의 결합을 통해 사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 옮겨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81, 88).

콜린스는 교차성과 함께 지배 매트릭스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다양한 억압이 현실 속에서 지배 집단의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되는 양상을 포착하고자 한다. 권력의 구조적, 훈육적, 헤게모니적, 대인관계적 작동은 상호보완적으로 지배집단의 권력을 재생산한다. 이와 같은 개념적 도구를 통해 콜린스는 지배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변화의 지점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콜린스가 제시하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과 인식론의 강점은 퀴어 이론의 목표에도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특히 “대안적인 지식은 그 자체로 기존 지식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콜린스의 지적은 핵심적이다(444). 퀴어 이론은 단지 ‘퀴어’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대안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 그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다. 콜린스의 문제의식을 따를 때 보다 궁극적인 목표는 ‘지금, 여기’ 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 ‘정상적인 몸’ 등에 대한 억압의 질서가 구조적,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 차원에서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으며, 거기에 동원되는 분할의 양상은 무엇인지, 주류 사회(과)학적 지식은 여기에 어떻게 복무하는지 분석하는 데에 있다.

 

이때 ‘경험’에 대한 질문이 등장할 수 있다. ‘퀴어’가 (아마도) 호명하는 집단은 누구이며, 이들의 경험 속에 분절되어 있고, 때로는 반목하는 특권과 차별을 어떻게 이론화 할 수 있을까? 예컨대 다양한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포괄할 수 있을까? 또, 이러한 정치적 기획이 내부의 차이를 지나치게 무화하려는 또 다른 탈정치적 맥락과 공모할 위험은 없을까?

 

 

패트리샤 힐 콜린스. 2008[1990] 박미선, 주해연 옮김.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이연.

 


정체성 정치와 교차성?

 

콜린스가 말하는 교차성/지배 매트릭스 논의는 정체성 정치를 비틀면서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즉, N개의 정체성이 아니라, 억압을 총체화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게 분석적으로 유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정세에 대한 분석이기도 할텐데, 이를테면 푸아르가 제안하는 배치들(assemblages)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교차성은 단순한 분석적 도구가 아니라 사유의 방식에 가깝다. 개념이나 범주로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사유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며, 따라서 이는 (굳이 교차성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부의 외부자와 같이 복합적인 위치성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현실의 복잡한 결에 천착해보겠다는 시도다.

 


주관과 객관, 연구자의 위치성, 경험의 의미?

 

기존의 지식체계가 인정하지 않는 경험과 목소리를 어떻게 말하고 쓸 수 있을까? 남성 중심적인 지식의 인증 체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가능한가? 경험세계와 이론의 결합, 실증주의를 활용하면서 이를 내파해야 하는 어떤 과정들이 있다면 이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이를테면 어떤 정치적 목표를 통해 가능할까? 연구자의 성찰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 쓰는가, 무엇을 위해 쓰는가?" 하는 질문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정치성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당사자성이 좋은 글은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경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윤리적이고,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