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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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방법론, 인식론

퀴어 이론과 정치학을 맥락화하기

플루키 2019. 4. 11. 23:15

1. 들어가며

 

한국에서 퀴어는 무엇일까? 미국에서 퀴어 이론과 퀴어 정치학이 고유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퀴어에는 역사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퀴어’는 Queer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를 통칭하는 말 또한 아닌 듯하다. ‘비규범적 성적 주체’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라고는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퀴어나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쓰이기 이전 시기의 존재들도 퀴어인가? 혹은 퀴어를 이처럼 명사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도 할 수 있을까? 퀴어를 둘러싼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성소수자’라는 범주의 문제뿐만 아니라 퀴어 정치학이란 무엇을 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퀴어 정치학이 질문되지 않는 것들을 질문하고, ‘이상하게 비트는’ 것이라면, 이때 질문되지 않아왔던 것들은 무엇인지 사유할 필요가 있다. 즉, 한 개인과 사회에게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란 무엇이었으며,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스로 수용가능성을 구축해온 지식-권력 체계는 무엇을 말해왔고, 또 말하지 않아왔냐는 것이다. 오늘 읽는 열다섯 편의 글은 저마다의 맥락에서 ‘퀴어’라는 질문을 통해 이러한 비판을 제공하고 있다. ‘퀴어한’ 존재와 ‘정상적’ 삶을 구분했던 역사적 계기들은 무엇이었으며, 지배적인 규범과 권력의 틈새에 균열을 냈던 존재들은 누구였으며, 이러한 지식-권력 체계의 경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긴장은 무엇이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퀴어 정치학에 있어서 충분히 질문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인지 되짚어보자는 시도이다.

 

2. 아마도 퀴어했을 존재들과 ‘정상적’ 삶을 주조했던 시간들

 

반동성애 혐오세력은 동성애가 ‘비정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성애는 (아마도 타락한) 서구 문화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혐오 담론 내에서 이런 주장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쉽게 수용되고 있다. 동성애는 정말 그저 서구적인 것에 불과할까? 박차민정(2011)은 한반도에 성에 관한 지식, 즉 ‘성과학’이 유입되기 시작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목한다. 일제에 의해 유입되기 시작한 성과학은 “성욕학”이라는 이름으로 성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전 시기까지 단지 성적 기행을 일컬었던 “변태성욕”은 점차 ‘동성연애자’와 ‘여장남자’ 등 이성애 관계 바깥의 행위를 포괄하는 용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박차민정, 2011: 38). 이는 동시에 여성과 남성 간의 성차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시대적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규범적 이성애’가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변화였다(박차민정, 2011: 46). 남녀동등을 주장하는 신여성의 등장 등으로 전통적인 젠더 표지가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성차를 유지하려는 반동적 힘이 거세게 작동했고, 그 과정은 “변태성욕자”를 통제하고 처벌하면서 성별화된 ‘이성애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었다(박차민정, 2011: 46). 이때 과학적 지식은 ‘이성애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의 ‘병리성’을 확증하였으며, 이제 섹스와 젠더에 대한 ‘정상성’은 윤리적, 의학적 담론 속에서 확정되고 통제되었다(박차민정, 2011: 49-50).

   그러나 당시 역사를 ‘성과학’의 확산과 ‘이성애 규범’의 확립 과정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박관수(2006)는 현장조사와 증언 채록을 통해 1940년대 강원도 지역에 동성 간 성 행위 및 친밀한 관계가 일상적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증언자들이 과거 동성애 행위에 대해 갖는 양가적 태도는 특기할만하다. 이들은 남성 동성애를 ‘지저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증언을 피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과거에는 동성애를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간극이 존재한다(박관수, 2006: 394). 이는 특정 행위에 대한 규범적 판단이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으며, 특히 반동성애 혐오담론의 주장과 달리 그 방향이 반대이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박관수(2006)는 당시 동성애 행위나 친밀한 관계가 계급이나 직업적으로 특이한 양상은 아니었다고 지적하면서도(395), 그 관계 양상이 연령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음을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이가 많은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10대 중반 남자아이를 ‘수동무’라고 하는데, 수동무 관계에 결부된 경제적 예속은 당시 동성애가 사회경제적 배경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의미화 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지혜(2010)도 박관수(2006)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에 주목한다. 이때 50년대는 전후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 간의 모임이 활성화되는 등 전통적인 성 역할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99). 여성의 자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점차 확장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보수적 성 관념을 강요하는 사회의 불일치 속에서 여성국극단체는 여성들에게 ‘안전한’ 동성친화적 공간이 될 수 있었다(104). 극단 내 동성애가 용인되고 협상되는 맥락에 ‘유교적인 연령위계’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 또한 한국적 특수성을 잘 보여준다고 김지혜(2010: 110)는 덧붙인다. 이때 김지혜(2010)가 동성애라는 일반적인 정의보다 좀 더 너르게 ‘동성친밀성’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여성국극단체 내 여성들의 관계는 단지 성애적 감정이나 성적 실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너른 친밀성 내지는 애착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극공동체가 “전근대적 성별 의식과 근대적인 여성문화가 조합”(122)되는 가운데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다양한 애착이 경합하는 공간이었음을 잘 보여준다(112).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정상적 이성애와 병리적 동성애를 쌍으로 하는 ‘이성애 규범’은 한국적 전통도 아니었으되, 일제나 서구의 ‘성과학’의 일방적인 유입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성애 규범’은 사회적으로는 성별 차이를 유지하고 (특히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려는 과정이었으며(박차민정, 2011), 동시에 ‘이성애 규범’ 바깥의 동성애나 동성친밀성은 당시 사회경제적, 문화적 조건과 변화하는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이성애 규범’과 경합해왔다(박관수, 2006; 김지혜, 2010). 이러한 맥락에서 루인(2012)의 연구는 성적 규범이 어떻게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했고, 그 가운데 규범 바깥의 존재들은 삭제되어 왔는지 적절하게 포착하고 있다.

   루인(2012)은 미군기지 근처에 위치한 이태원이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벌어진 성적 규범의 경합을 추적한다. 이태원 ‘양공주촌’의 특징은 다른 지역과 달리 트랜스젠더나 여장남자, 동성애 같은 비규범적인 섹슈얼리티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안보정국에서 이태원 또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본보기 중에 하나였고, 1971년 시작된 ‘기지촌정화운동’은 트랜스젠더 등 비규범적 성적 주체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루인은 이전 시기와 비교해서 1970년대 이후가 되면 언론에서 트랜스젠더에 관한 기사가 급감하는 데 주목한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이들에 대한 기사가 증가하는데, 이는 유신 시기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징후적으로 보여준다(259). 또한, 당시는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된 시기도 중첩되는데 이제 “개인은 주민등록번호 상의 젠더와 일치해야 하고, 지정된 젠더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또한 성병 없는 상태에서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이성애 섹슈얼리티만을 실천해야” 한다는 규범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264). 1980년대의 에이즈 공포는 이 같은 흐름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270).

   루인(2012)의 논의를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비규범적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단지 ‘성과학’ 지식만이 아니라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는 군사정권의 기획과 점차 결합되었다.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같은 비규범적인 성적 존재를 통제하는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이성애 섹슈얼리티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규범화하면서 군사화 된 ‘남성-국민’을 호명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또한 주목하야 할 지점은 ‘게이’나 ‘호모’와 같은 용법이 지금 통용되는 방식과 달랐다는 점인데(루인, 2012: 268), 이는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와 실천들이 그 자체로 ‘퀴어한’ 영역에 지속되어 왔음을 잘 보여준다.

 

2.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운동의 성장

 

퀴어한 존재들은 언제나 ‘비정상’으로 통제되고 처벌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통제의 과정은 동시에 성적 타자들에게 집단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명시적으로 ‘성소수자 인권 단체’가 출현하는 1990년대 이전부터 이미 성소수자 커뮤니티라고 할 만한 공간과 집단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여성국극단체와 유사한 동성친밀성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택시운전사회>(여운회)는 물론 명동의 레즈비언 업소와 게이 크루징이 이루어진 극장들, 을지로와 신당동 일대의 게이바,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종로3가와 이태원의 게토가 포함된다(한채윤, 2011: 102-103; 친구사이, 2011: 61; 끼리끼리, 2004: 43). 물론 이때 레즈비언이나 게이, 트랜스젠더 등의 의미는 오늘날의 정체성과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들을 ‘성소수자’나 ‘퀴어’로 환원할 수는 없겠으나, 이들 커뮤니티의 성장이 이후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93년 12월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원년처럼 회자된다. 바로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 초동회가 탄생한 것이다(한채윤, 2011: 105). 그러나 <초동회>는 금새 해산되고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한국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끼리끼리>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분리가 ‘젠더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다소 논쟁적이다. 끼리끼리(2004: 44)는 당시 분리가 “게이들의 가부장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한채윤(2011: 105)은 오히려 <초동회>의 문제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데서 이유를 찾고 있다. 1995년 발족한 <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동인협)의 인권 캠프 토크쇼에 참여한 전해성 <끼리끼리> 초대회장과 오준수 <친구사이> 사무총장의 회고는 당시 레즈비언과 게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이를 “적대적인 분리가 아니라, 서로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긍정적인 분리”라고 평가한다(터울, 2014). 서로의 문제의식 하에서 역량을 강화해 다시 힘을 합치기로 했고, 1995년의 동인협, 그리고 1998년의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동단협), 2002년의 한국동성애자연합(한동연)과 같은 연대조직의 결집과 해산은 그러한 과정을 보여준다(터울, 2014).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1990년대 중반 활성화된 PC 통신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했다. 당시 성행했던 성정치학 담론과 성소수자 게토의 가시화는 이러한 흐름과 함께했다. 그러나 이러한 커뮤니티의 성장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에게는 동시에 도전이기도 했다. <끼리끼리>와 <친구사이> 모두 친목모임과 인권운동 사이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성소수자의 삶의 조건을 고려하면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에서 커뮤니티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온/오프라인의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점차 성장하면서 인권운동단체로서 지속가능성이 도전받았게 된 것이다(끼리끼리, 2004: 48; 친구사이, 2011: 69-70). 그러한 와중에도 성소수자 인권단체는 집단적인 대사회 커밍아웃을 지속하는 한편 노동운동에 연대하는 등 운동단체로서의 경험과 역량 또한 쌓아나갔다(친구사이, 2011: 65). 게이사이트 <엑스존>의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에 맞서 청소년보호법 내 동성애 항목을 삭제하도록 투쟁한 사건은 중요한 승리의 기억으로 남기도 했다(한채윤, 2011: 117). 성소수자 운동과 여성 운동의 관계, 혹은 레즈비언과 여성의 관계는 새로운 운동의 지점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운동 내에서 레즈비언에 위치에 관한 것이다. 정치적 레즈비언과 ‘참레즈비언’의 구분을 둘러싼 논쟁, 레즈비언 단체를 여성단체로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한 저항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한채윤, 2011: 121-122).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성장하는 가운데 내부의 차이들에 대한 질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게이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이와 같은 논쟁이 나타났다. 특히 ‘기혼이반’을 둘러싼 게이 커뮤니티 내부의 논쟁은 지배적인 이성애 규범 속에서 어떻게 긍정적인 성소수자 정체성을 확립할 것인지를 두고 전개된 것으로, 일종의 ‘호모규범성’(규범적 동성애)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터울(2016)은 이와 같은 논쟁을 가족구성권과 동성혼 논의의 전사로 위치시키며, 성소수자 커뮤티니와 정체성이 단지 사회적 규범과 통제, 혹은 지배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의 경합과 협상의 결과로서 등장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35). 이러한 경합과 협상은 게이 커뮤니티와 ‘찜방’으로 대표되는 업소의 관계 설정에 관한 논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찜방’ 문화를 배격해야 한다는 당시 많은 주장은 동성애를 ‘음란한’ 섹슈얼리티의 낙인에서 구출하여 “인격적인 이반사회”를 제시하고자 했다(터울, 2016: 45). 그러나 ‘찜방’ 문화와 함께 갈 수 없다는 선언은 동시에 동성애를 문란한 섹슈얼리티로 타자화 하는 사회적 규범과 공명한다. 즉, 이와 같은 논쟁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인권운동에게 있어서 퀴어 정치학에 대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3. 차별금지법과 혐오의 정치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고, 낙인찍혀 있던 존재들이 스스로 드러내는 커밍아웃 자체는 성소수자에게 정치 그 자체나 다름없다. 또한 앞서 살펴본 <엑스존> 사건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성적 지향을 포함시킨 것은 커다란 정치적 상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에게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치적 도전을 불러왔음은 분명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성소수자 인권을 국가에서 보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 아니라,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 반동성애 보수 개신교 집단의 정치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소극적이나마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적이 있기는 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공격하는 세력이 정치화 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친구사이, 2011: 90).

   한채윤(2017)은 반동성애 보수 개신교 집단의 정치세력화가 단지 기독교의 교리와 같은 내적 논리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핵심은 사립학교법 개정을 막기 위한 기독교 세력의 정치세력화 과정에 차별금지법이 놓여있었다는 점이다(162). 차별금지법의 최초 입법 시 우려했던 것은 노동권 강화에 대한 재계의 반대였는데 실상은 개신교계가 동성애를 이유로 가장 적극적인 반대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의 영향력 약화를 우려했던 보수 개신교계는 동성애를 외부의 적으로 상정하고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면서 내부 결집을 다지고자 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둘러싼 개신교계 내부의 갈등은 이들에게 중요한 계기였다. 근본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대는 보수 교단은 종교 다원주의와 공산주의를 포용하는 WCC를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했는데, 이때 ‘에이즈’와 ‘남자 며느리’ 등 동성애를 비난하는 수사는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169). 나아가 한채윤(2017)은 동성애를 외부의 적으로 상정하는(이때 ‘적’은 동성애뿐만 아니라 빨갱이, 종북 좌파, 전교조, 이슬람 등인에 이들은 모두 연결된다) 전략은 보수 개신교 내부의 위기와 모순, 비리를 감추는 효과를 낳았다고 덧붙인다(181). 이들이야 말로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필요로 했던 셈이다.

   차별금지법이 최초로 좌절된 사건은 성소수자 인권운동 뿐만 아니라 인권운동 전반에 여러 시사점을 남겼다. 당시 법무부는 부분적으로나마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고자 ‘성적 지향, 학력, 병력, 언어, 출신국가,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범죄전력’을 비밀리에 삭제했다(나영정, 2015: 235). 이는 크게 재계가 반대하는 사유와 기독교계가 반대하는 사유로 나누어지는데, 즉 차별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 역학관계에 놓여있는지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인권이 분할되어 “타협과 협상, 굴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나영정, 2015: 236). 조직화된 혐오에 마주하여 성소수자 운동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을 발족하였고, 2010년에는 법무부의 차별금지법에 대응해 <차별금지법 제정연대>도 설립되었다. 이후에도 정치 세력화된 혐오 집단의 반대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와 서울시민 인권헌장, 군형법 상 추행죄 등의 사안마다 점점 거세졌다.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법과 제도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시도가 반동성에 혐오세력에 의해 저지된 일련의 사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에게 심대한 도전이다. 나영정(2015)은 서구의 섹슈얼리티 논의와 성소수자 운동이 공적/사적이라는 서구적 시민권 개념에 터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의 경우 ‘개인’ 개념에 우선하는 가족적 테두리와 이원 젠더 질서 속에서 어떻게 성소수자 인권을 국가 거버넌스 내에 진입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 질문한다(250). 실제로 반동성애 혐오담론은 동성애가 허용되면 가족이 해체되고, 이는 곧 국가와 민족에 대한 위협이라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다시 말해 성적 규범이라는 것은 단지 개인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가족(그리고 국가)을 지탱하는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나영정(2015)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지점에서 국가와 정치의 문제로 나아간다. 여전히 여성을 가족 내부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가의 통치를 감안하면 성적 시민권을 성취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앞서 터울(2016)의 글에서 살펴보았던 어떤 ‘규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즉, 이성애 정상가족 모델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통치, 그에 조응하는 반동성애 혐오담론에 맞서 성소수자의 주체성과 시민권을 성취하고자 할 때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발굴해낼 것인가?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인권운동, 그리고 국가의 통치와 혐오담론의 지형이 서구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퀴어 이론과 정치학은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4. 퀴어 정치학의 질문들, 퀴어를 더 퀴어하게

 

한주희(2015)의 글은 이와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는 “지금의 퀴어 정치에는 무엇이 정치적인가? 또는, 퀴어 정치에는 무엇이 퀴어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퀴어 정치학의 의미를 되짚는다(63). 그에게 퀴어 정치는 단지 입법 투쟁뿐만 아니라 상징을 둘러싼 투쟁이면서, 동시에 연대와 친밀감으로 채워지는 일상적 삶으로 의미화 된다(64). 동시에 이때 퀴어와 반퀴어를 가르는 것은 단순히 종교나 제국주의, 반공 이데올로기만은 아니다. 한인 디아스포라가 어떻게 퀴어와 반퀴어 운동에 연루되는지, 그리고 미국 내 한인 사회의 혼종적 호모포비아가 어떻게 한국의 반동성애 혐오담론과 조응하는지 서술하면서, 한주희(2015)는 퀴어 정치학이 정체성 정치 너머의 교차점들을 분석하고, 초국가적 질서와 성적, 인종적, 젠더적 위계 구조가 어떻게 절합/배치(assemblages)되는지 비판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76).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반동성애 혐오담론은 그저 미국 근본주의 개신교의 영향이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 그 자체로 분석되어야 하며, 성소수자 인권은 바로 그러한 질서의 교차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애 규범과 성소수자 정체성이 한국적 맥락에서 경합하면서 등장했음을 분석한 앞선 논의들과 공명한다. 그러면서 한주희는 2015년에 서울 시청 앞 광장이라는 공간에 주목한다. 경찰을 사이에 두고 퀴어와 반퀴어가 나누어져 있었던 이 공간적 분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저항과 인정, 차이와 규범 사이를 길항하는 퀴어 정치학은 퀴어를 넘어 더 많은 것을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질문은 퀴어 이론이 비판 이론으로서 무엇을 하는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현재의 권력 구도를 지속시키는 인식 체계란 무엇인지 되묻는 데 퀴어 이론에 의의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우(2015)와 루인(2015)의 글은 쉽게 사용되는 ‘혐오’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재사유를 요청한다. 먼저 시우(2015)는 한주희(2015)가 했던 고민의 연장선에서 퀴어퍼레이드와 개신교의 반동성애 사이에 놓여있는 혐오란 무엇인지 탐문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질문인데, 하나는 “누가 혐오하는 주체인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은 ‘어떻게’ 혐오하는가?”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퀴어퍼레이드를 출입할 수 있는 ‘퀴어’의 불분명한 경계와 혐오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혐오세력’의 불분명함은 중첩되면서 이 두 가지 질문을 하나로 엮어낸다. 이러한 질문이 향하는 것은 ‘혐오’를 미리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로 확정하였을 때 현실의 복잡다단한 혐오를 이해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이다. 이는 혐오라는 개념이 다양한 차별과 억압, 폭력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최근 경향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 있는 질문이다.

   루인(2015)은 이 질문을 더욱 밀어붙여본다. 혐오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서, 도대체 “혐오는 어떤 의미인가?”하는 것이다(108).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반동성애 혐오담론 양자에서 끊임없이 삭제되는 바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퀴어의 존재를 환기하면서 루인(2015)은 혐오가 단지 가해와 피해라는 구도로만 작동하지 않음을 지적한다(173).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 동성애와 바이섹슈얼이 갖고 있는 긴장관계는 어쩌면 존재를 삭제하고, 배제하고, ‘가짜’임을 끊임없이 의심한다는 점에서 반동성애 혐오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바이섹슈얼 여성의 결혼과 게이 커플의 결혼에 대한 이중적인 가치 판단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퀴어에 관한 정체성이 이미 이성애 규범, 성별 이분법, 그러니까 이들이 ‘혐오’라고 부르는 인식론에 틀지어져 있다는 사실이다(220). 지금까지 살펴본 많은 논의에서도 퀴어한 존재들은 동시에 규범적인 질서에 끊임없이 협상하고 포섭되어 왔다는 점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루인(2015)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한 혐오의 다른 측면들이 동시에 어떻게 몸과 관계를 형성해내고 있는지에 주목하며, 단순하게 “혐오가 나쁘다”는 차원을 넘어 혐오의 발화자가 원했던 효과를 넘어서자고 제안한다(224-25).

   이는 퀴어의 주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 사유하자는 기획이기도 하다. 김현철(2015)과 강오름(2014)은 이들은 이미 이성애 규범으로 점철되어 있는 공간에서 어떻게 퀴어한 존재와 실천이 가능한지 탐색한다. 김현철(2015)은 도시공간을 걸으면서 자신을 전시하는 퀴어퍼레이드를 도시 공간의 공공성에 대한 저항과 도시에 대한 권리로 정의한다. 강오름(2014) 또한 레즈비언 공동체가 특정 지역에 정착하고 세력화 하는 과정을 통해 저항의 가능성을 포착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을 점유하고 ‘퀴어링’ 하는 작업은 일방적인 과정만은 아니었다. 이는 한편으로 ‘퀴어의 영토’를 확장하고 성소수자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실천이면서(강오름, 2014: 43), 동시에 지배적인 규범과의 협상 속에서 퀴어성을 상실하고 마는 과정이기도 하다(김현철, 2015: 55).

   이러한 분석은 ‘퀴어’가 끊임없이 비판적인 분석틀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퀴어 정치학은 지배적인 규범에 끊임없이 파열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거기에 포섭될 수 있는 위험을 동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퀴어 이론은 이를 더 복잡하게 분석하고 그 전제들을 다시금 되물을 수 있을 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분석과 비판은 ‘지금, 여기’라는 맥락에 대한 질문, 즉 한국 퀴어 정치학의 지정학적, 역사적 분석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하며, 단순한 이분법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자, 그로부터 실제 일상을 살아가는 삶을 포착하고 이들의 미시적 삶과 거시적 통치를 연결하여 사유하자는 요청이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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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쪽글 때문에 급하게 쓴 글이라 여러모로 간략하게 서술한 부분이 많은 점 감안 바랍니다. 추후 (체력이 생기면;;;) 수정 보완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