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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적 국가에서 성적 투쟁은 어떻게 가능할까?

플루키 2019. 3. 27. 17:30

권위주의적인 국가에서 집합적 행동, 사회운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에서는 권리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이 형성되곤 하는데, 권위주의적인 국가에서는 사회운동에 미치는 국가의 영향력이 비대하고 시민들에게 주어진 운신의 폭 자체가 좁기 때문에 서구의 사회운동과는 다른 방식의 전략이 요구된다. 이에 Chua(2012)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사회운동이 법 혹은 법적 정당성을 매개로 어떻게 형성, 유지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Chua(2012)는 싱가포르의 게이인권운동을 사례로 권위주의적인 국가에서 사회운동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 될 수 있고,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요소는 무엇인지, 특히 법(혹은 법적 정당성)이 어떤 역할을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에서 해방된 이후 싱가포르는 견실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비민주적인 정치 제도와 문화적 규범이 지속되고 있다. 많은 풀뿌리 운동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의심받으며 탄압을 받으며, 정부는 인권 등 국제적 정당성을 포기하더라도 내부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편을 택한다.

 

사회운동에 억압적인 환경에서 특정 부문의 사회운동이 형성, 지속될 수 있는 조건과 매개되는 경합의 공간은 무엇인지가 이론적 쟁점이다. 오랜 민주주의 전통 하에서 권리 담론이 뒷받침하고 있는 서구 사회의 사회운동과 달리 비서구 사회의 사회운동은 전혀 다른 사회정치적 조건 위에 놓여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연구는 국가적, 정치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 게이인권운동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하지만, 국가가 어떻게 사회운동을 억압하게 되는지,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그러한 억압에 어떻게 대응하여 운동을 만들어 나가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게이인권 활동가들이 억압적인 정부와 어떻게 전략적 댄스를 추는지 살펴보기 위해, Chua는 100명의 활동가와 반구조화된 심층면접을 진행하고 140시간 동안 게이인권운동을 참여관찰 했다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범주화를 진행했고추가적으로 이를 분석하고자 20여 년간 축적된 관련 문서를 참고했다특히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운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자신의 위치성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관심사 하에서 Chua는 억압적인 국가권력 속에서 싱가포르 게이인권활동가들이 ‘실용주의적 저항’ 전략을 채택했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고 정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싱가포르 게이인권 활동가들은 정권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선을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신호를 탐색하며, 그 과정에서 합법적인 방법만을 동원하고자 애쓴다. 시민으로서(비민주적 정치제도), 그리고 성소수자로서(377A 조항), 법은 규제와 억압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법적 정당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법은 경합의 공간이자 사회개혁을 위한 실용적 저항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싱가포르의 억압적인 정치권력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시민권의 확장을 경계할 뿐 이를테면 동성애 자체에 적대적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경우 오랜 군사주의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이 중점적으로 전개되었고, 다양한 의제를 지닌 사회운동은 87년 민주화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즉 민주화 운동이 주를 이루었던 한국과 싱가포르의 상황은 무척이나 다른데, 이는 경제적인 상황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민주화 운동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수많은 노동운동을 고려할 때, 견실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싱가포르에서 사회운동의 각 부문이 분화되고 더 많은 민주주의와 시민권이라는 의제로 통일되지 못하는 데에는 경제적 안정성에 기대고 있는 정치적 안정성이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한국은 민주화 이후 성소수자 운동의 흐름이 등장했으나, 경제적인 격변 속에서 전체적인 시민권, 노동 운동과 어느 정도 결합되어 있는 듯하다. 또한 싱가포르와 달리 한국의 경우 비교적 언론, 결사, 집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은 어떠한 운동의 전략을 취하며, 그러한 가운데 국가(정부)와의 관계는 어떻게 취하는가? 동시에 거기에서 법률, 법적 정당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Chua의 글은 비서구 맥락에서 성소수자 운동이 권리 담론으로 오롯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 성소수자 운동이 마주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단지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만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를 살펴볼 수 있을 테다. 예컨대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회운동 단체는 2000년대 민주정권 하에서 국가 지원 속으로 포섭되었다가, 지난 9년의 세월동안 자립하는 기간을 거쳐 왔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가 이러한 궤적 속에 놓여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한국 사회의 사회운동 전반의 경향 속에서 성소수자 운동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Chua의 논의를 더욱 확장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Chua, L. J. (2012). Pragmatic Resistance, Law, and Social Movements in Authoritarian States: The Case of Gay Collective Action in S ingapore. Law & Society Review46(4), 713-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