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 사회학

[번역] 동성애의 형성 - Jeffrey Weeks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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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동성애의 형성 - Jeffrey Weeks (1/2)

플루키 2019. 3. 27. 16:29

동성애의 형성

Jeffrey Weeks(1996)

 


 

동성애 : 개념과 결과들

 

  성(sex)의 역사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성적 경험의 주된 방식에 집중하면서 소수의 방식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출생과 성장, 짝짓기와 재생산 같은 위대한 의식이 우리 사회의 중심이라고 볼 때 이는 놀랍지 않다. 그러나 혼외의·출산과 관련 없는·일부일처제가 아닌·이성애가 아닌 관계를 모른 체하면 사회적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억누르게 된다. 실제로는 따로 떨어져있는 부분이 아닌데도 말이다. 간통과 소도미(sodomy)에 대한 중세 교회의 통제나 동성애와 매춘에 대한 근대 국가의 규제 등 서구 역사 전반에 걸쳐 혼외 섹스에 관한 규제는 도덕적 질서를 이끄는 핵심이었다.

 

  모든 성적 “변이(variations)” 가운데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가장 명백하게 억압받아 왔으며, (대개 지극히 왜곡된 경우인데) 매우 생생한 역사적 기억을 불러온다. 해브록 엘리스(Havelock Ellis)부터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Kinsey)에 이르는 많은 성 과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문화가 이성애 규범에 매우 가깝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동성애가 지속적으로 사회적 억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그로부터 유발된 적대감이 만들어낸 불가피한 영향으로 적대적인 분류에 대한 가장 실질적인 형태의 저항이 형성됐고, 결과적으로 오랜 문화와 하위문화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동성애 연구는 매우 중요한데, 동성애에 대한 본질적 관심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 성적 범주의 발전, 다양한 성 정체성의 가능성 때문에 그러하다.

 

  행위로서의 동성애(homosexual behavior)를 동성애 역할(homosexual roles)이나 범주화(categorizations), 혹은 정체성(identities)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 최근 몇 년간 사회학자를 시작으로 역사학자 사이에서도 분명해졌다. 동성애 행위가 다양한 문화권에 존재해왔고, 근절할 수 없는 인간의 성적 가능성이라는 점도 19세기 이후 인류학자와 성 과학자가 공유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향한 반응 또한 매우 다양하다. 다시 말해, 동성애 행위를 향한 태도는 문화적으로 특수해서 다른 문화나 다양한 역사적 시기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다. 보다 불분명하지만 오늘날 어떤 역사적 작업에서 핵심은 동성 간 섹스를 향한 태도가 다양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성애가 갖는 사회적, 주관적 의미 또한 문화적 특수성을 갖는다는 점을 깨닫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더 이상 동성애의 보편적 역사의 가능성을 논할 수 없다. 사회적 반응과 개인적인 정체성이라는 측면, 즉 엄밀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동성애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성 간 섹스의 다양한 가능성은 광범위한 젠더와 성적 규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상이한 문화에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육체적 행위는 비슷할지 몰라도 대개 그 사회적인 영향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문화에서 동성애는 다양한 시기에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비난받는 경험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인구의 대부분에 의해 불행한 소수집단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경향에서 “일탈(deviance)”, 특히 전통적이지 않은 성은 여전히 사회가 마땅히 대응해야 할 개인의 내재적인 특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회가 단지 일탈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일탈을 구성하는 일부임이 지난 20년 동안 점차적으로 드러났다. 사회적 낙인의 효과에 관한 고전적인 서술은 에드윈 레머트(Edwin Lemert)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에 내재된 “1차적 일탈”과 사회적으로 규정된 결과인 “2차적 일탈”을 구분한다. 이러한 제안에는 두 가지 층위의 분석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성애와 동성애를 막론하고 젠더화되고 성화(sexed)된 개인들의 실제적 창조에 관한 문제가 있다. 최근 사회심리학과 신프로이트 학파의 발전은 어린 시절 이성애나 동성애 성향의 발달이 생물학의 본질적인 명령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가족과 사회가 지속적으로 어린 아이의 성적 잠재력에 영향을 미친 결과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변화하는 가족 형태, 부모의 역할이나 유년기의 의미 변화 따위가 한 개인이 이성애나 동성애, 혹은 다른 성적 범주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감정은 저마다의 사회적 형태나 강제에 따라 상이하게 구조화된다. 그러나 일차적인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형성될지라도 논쟁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이차적으로 특정한 사회 형태에서 나타나는 성적 개인에 대한 사회적 반응과 개인적인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은 [생물학적] 차이를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대개 문제적인 효과를 갖는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꼭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과제는 동성애에 관한 사회적 낙인의 다양한 원인과 광범위하게 적대적인 규제에 관한 개인적, 사회적 반응을 설명하는 데에 있다. 이는 원인이 되는 하나의 요인을 찾자는 말이 아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특정 사회에서 성적 행위에 관한 특정한 규제 양상이 등장하게 된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의 역사에서 이는 매리 매킨토시(Mary McIntosh)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한 탐구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바로 동성애가 어떤 이에게는 이상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않은 정신적 혹은 감정적 조건이라는 관념의 등장과 이러한 개념화의 사회적 함의에 관한 것이다.

 

  매리 매킨토시는 매우 도발적인 논문에서 그가 “동성애 역할(homosexual role)”이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을 이론화한다. 다시 말해 매킨토시가 추적한 17세기 후반의 특정한 역사적 환경 하에서 특수한 남성(또한 이후에도 대개 남성인) 역할이 등장한다. 이 멸시받고 처벌받는 역할은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한 유사한 대우가 나머지 사회 법을 지속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의 대부분을 순수하게 유지한다.” 이러한 역할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먼저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는 행동 사이에 명확한 기준점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탈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분리하면서 그들의 행동 패턴을 포함하면서 제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수한 역할의 발달과 상호 연관되어 있는 동성애 하위문화는 사회적으로 불법적인 욕구(섹스)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하며 일탈을 포함한다.

 

  이러한 통찰은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지만, 탐색적인 논문이 대개 그러하듯이 해결되지 않은 질문도 많이 남겼다. 최근 연구는 역할 이론과 기능주의의 일반적인 설명에 도전하는데, 이들이 선험적인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명백히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중요성을 오독하는 것이다. 해당 논문은 구조주의-기능주의적 접근의 일반적인 결함, 특히 사회적 통제에 관한 목적주의적인 노력을 함의한다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핵심은 역사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접근에 있는데, 경험을 형성하는 사회적 범주라는 측면과 오랜 역사적 발전을 통해 복잡한 문화 및 하위문화 형태와 특유의 일련의 성 정체성이 생겨난 동성애에 대한 반응 자체라는 측면에서 동성애(다른 형태의 성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연구가 필요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정체성은 반드시 특수성, 역사성, 계급, 젠더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자와 역사학자가 대체로 여성과 남성의 동성애를 동일한 원인과 특성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나, 실상 그들의 사회적 역사는 분명 관계는 있으나 구분된다는 점에서 젠더는 특히 중요하다. 동성애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행위의 범위에 관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분할이었기에 사회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도덕적, 법적 및 의학적 규제

 

  대개 레즈비언보다는 남성 동성애 활동에 대해서만 공식적인 규제의 형태를 취했지만, 동성애에 대한 적개심은 서구 기독교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기독교 시대 서구 사회는 실제로 유래 없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를 금기시했다. 그리스에서 흔히 사회적으로 수용되었던 페다고지 관계나 몇몇 부족 사회에서 트랜스베스타잇(베르다쉬)의 발달과 같은 비교 문화적 증거는 다른 문화에서 동성애 행위가 성적 관습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금지는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강력히 지속되었으며, 여성과 남성의 동성애 행위에 상이한 영향을 미쳤다. 1885년 이전 영국에서 동성애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법은 실제로는 소도미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름 붙여지지 않은 범죄, “자연을 거스르는 죄악(sin)”은 극심한 공포를 불러왔다. 18세기 말 법학자였던 윌리암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이 고전적 입장을 요약했는데, 그는 소도미에 대한 언급이 “인간 본성에 대한 수치”라고 느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에 대한 도전은 오롯이 동성애 행위의 몫은 아니었다. 1533년 헨리 8세가 제정한 법은 최초로 교회법을 대체하는 성문법의 범위에 교회 율법을 따라 비역(buggery)을 포함했다. 남성과 여성, 사람과 짐승, 혹은 남성과 남성 사이 등 모든 비역 행위는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비역이라는 가증스러운 죄악”의 처벌은 사형이었으며, 죽음의 처벌은 공식적으로는 1861년까지 성문법에 남아있었다. 이러한 법률은 1885년까지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동성애에 관한 모든 유죄 판결의 기초가 되었다. 동성애 활동의 다른 형태는 폭력이나 중대한 범죄의 주요 형태로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은 실제로 비역에 관한 법률로 기소된 대부분의 사람이 동성애 행위(소도미)로 기소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법률은 일련의 성행위를 직접 겨냥하는 것이었지 특정한 사람에 관한 법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동성애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가진 특정한 속성이 아니라 모든 관능적인 존재가 잠재적으로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던 듯하다. 소도미 법의 핵심적인 측면은 출산과 관계없는 모든 섹스에 대한 규제였고, 이는 특히 남성을 겨냥했다. 레즈비언 행동도 다양하게 비난받았지만, 최소한 앵글로색슨 문화에서 그러한 위협은 법적 규제에서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

 

  “자연에 반하는 죄악”은 특이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1815년에 비역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HMS 아프리칸호의 한 선원은 “이 세상에서 신이 결코 더 이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끔찍한 어둠의 그림자로부터 그 성향이 인간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범죄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남색가(sodomite)”라는 별칭은 확실히 19세기 내내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세기 초에는 유죄 판결을 남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에 대한 대중의 커다란 반감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었고, 1895년에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그를 “somdomite”라는 흉내 낼 수 없는 잘못된 표기로 기소한 퀸즈베리 후작에 대한 비참한 명예훼손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섬너(Sumner) 경이 1918년 사회적 낙인에 대한 존경받았던 판결에서 특징지어진 것처럼 남색가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신체적으로 특이한 신체적 특성만큼이나 특별하고 유별난 특징”을 지녔다고 각인되었다.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소도미 법의 실제 집행을 세부적으로 추적하거나 그 법에 따라 기소된 사람들이 만들어낸 성 정체성의 종류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법의 집행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고 서로 다른 사회 계층 사이에서 달라졌다. 17세기 말과 1720년대 들어 도덕성 회복 운동과 몇몇 대도시에서 독특한 남성 동성애적 하위문화의 출현과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유죄 판결이 빈번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19세기 초에 기소 건수가 명백히 증가했는데,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50명 이상의 남성이 남색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806년 한 해 동안 살인죄보다 남색에 대한 사형이 더 많았고, 1810년에는 남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5명 중 4명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법은 극적이고 모범적인 결과를 가져올 군인에게 특히 엄하게 적용되었다. 1811년 기수 존 헵번(John Hepburn)과 드러머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는 많은 유명인과 왕실 가족을 포함한 “거대한 관중” 앞에서 "영원을 향해“ 보내졌다. 또한 1816년 2월, 아프리칸호의 승무원 중 4명은 대규모 해군 스캔들 이후에 비역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역 행위는 17세기 이래 전쟁에 관한 글에 언급되었으며, 탈영이나 반란, 살인처럼 엄중하게 다루어졌다.

 

  영국이 전쟁 중이었는지 혹은 사회적인 혼란 상태와 비역으로 기소된 수가 증가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특히 19세기 초에 분명히 그러했다; 이후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행위는 종종 전반적인 사회적 불안에 대한 표지였다. 소도미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을 폐지하기 위한 노력은 대가 성공하지 못했다. 로버트 필(Robert Peel) 경은 1826년에 시도한 개혁에서 이를 다시금 확인했다; 존 러셀(John Russell)도 1841년에 사형 제도의 목록에서 “반자연적인 범죄unnatural offences”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의회의 지원 부족으로 이를 철회해야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830년대 이후에는 사형이 적용되지 않았고, 마침내 1861년에 폐지되었다(10년 이상 혹은 종신형으로 대체되었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엄밀히 법을 보면 소도미 법은 정교한 법적 무기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어서 개인들을 세부적으로 감시한다기보다는 전반적인 법적 통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817년 말 한 남성이 소년(소년은 나중에 사면되었다)과 구강성교를 하고 소도미 법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이때 “반자연적인 범죄(unnatural offences)”라는 용어는 수간부터 낙태를 아우르는 다층적인 의미를 포괄했다. 소도미의 불확실한 위상은 1870년대 초에 다른 자들과 소도미 행위를 공모했던 트랜스베스타잇 어니스트 볼튼(Ernest Boulton)과 프레드릭 윌리엄 파크(Frederick William Park)의 악명 높은 기소에서 두드러졌다. 경찰, 법 그리고 의학적 태도는 명백히 혼란스러웠다. 볼튼과 파크가 1870년에 외설적인 행위 때문에 체포되었을 때(공공장소에서 크로스드레싱을 했음), 그들은 소도미의 증거에 대해 허가도 없이 즉각적인 조사를 받았다. 재판(그 자체가 중요한 공적 행사였는데, 웨스트민스터 홀의 최고재판장에서 열렸고 언론 보도도 포화 상태였다) 기록을 보면 법원이나 경찰 모두 남성 동성애의 패턴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무상의 개회사는 복장도착을 암시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핵심은 마치 여성처럼 남성을 유혹한 것이라는 식으로 평했다. 소도미 행위로 체포된 그들을 조사한 폴 박사(Dr.Paul)는 그와 유사한 경우를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의 유일한 지식은 알프레드 스웨인 테일러(Alfred Swaine Taylor)의 의료법학에 나오는 거의 잊혀진 사건 정도였다. 그러나 사건에서 증거를 제시한 테일러 자신조차 해당 사건 이외의 이전 경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의사들도 소도미적인 행위의 징후가 무엇인지 합의할 수 없었다. 법무상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나라에서 그들에게 귀속되는 행위 성향을 지닌 사람이 발견되는 것이 드문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때까지 “과학적” 문헌 자료는 프랑스에 있었는데, 그들은 마지못해 이를 부각했다. 폴 박사는 한 익명의 편지가 그에게 알려주기 전까지 타르디유(Tardieu)가 법적 증명을 목적으로 200명의 소도미를 분석한 연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법무상은 “이 나라에 이 주제[소도미]에 관한 지식이나 연구가 거의 없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단 중 한 명은 더욱 신랄하게 “이 주제에 관한 프랑스 문헌의 새로운 보물들, 감사하게도 신은 여전히 영국 외과의 도서관에는 낯설군요”라며 폴 박사를 공격했다.

 

  이 모든 것에서 놀라운 점은 1871년이 되어서도 동성애 개념은 대도시 경찰이나 고등 의료집단, 고등 사법집단 모두에서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동성애 범주에 관한 분명한 개념이나 동성애 정체성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어떤 사회적 인식도 부재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보다 일찍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17세기 초반부터는 분명히 일종의 트랜스베스타잇이나 남성 성매매 하위문화의 존재가 널리 인식되었으며, 19세기 초반에는 법정에서 결혼한 남자는 다른 남자에게 소도미 행위를 덜 저지를 것으로 종종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조차 1871년 볼튼과 파크의 사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대중적 관념은 남성 동성애 행위를 여성스러움이나 어쩌면 트랜스베스타잇과 연관 짓는 경향과 대개 함께 존재했다. 제시되었던 반증 사례는 언제나 놀라움을 선사했다. 1813년에 출판된 『소돔의 불사조The Phoenix of Sodom』의 저자는 성판매자 남성이 종종 여성스러운 남성이 아니라 석탄 상인, 경찰관, 웨이터, 하인, 곡물상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동성애가 삶의 “이력career”의 핵심을 구성한다는 인식은 없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갈 무렵 비범한 견해를 보인 실용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조차 항상 남색가를 다른 성인 남성을 사랑하는 성인 남성으로 이해하는 대신 결혼할 수 있고, 어린 소년에 끌리는 “양성애자bisexual”로 상상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에 이르자 그 새로운 정의나 실천의 요소가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는 하나 동성애는 분명히 새롭게 개념화되어 나타났다. 푸코(Foucault)가 말했듯이, 남색가는 일시적인 일탈이었다. 반면에 하나의 종(species)에 속하는 “동성애자(homosexual”)는 법적, 심리학적, 의학적 범주에 있어서 모두 새로운 관심사가 되는 동성애자 개인으로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가리키는데, 이는 사회적 관찰과 사색의 새로운 주제를 제공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표현할 새로운 방식의 가능성을 열어 재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대로 동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새로운 용어가 발달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성과학자들과 동성애자 당사자 모두에게 “동성애자” 혹은 “성도착자(invert)”와 같은 단어가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채택된 것은 1970년대 “게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진 것과 같은 의식상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했다. 이 단계에서 법적 태도와 의학적 태도의 변화는 중요한 요소였다. 1861년 인간에 대한 범죄 조항은 문명화를 향한 공식적인 움직임을 반영하며 비역에 대한 사형 제도를 폐지했다(10년 이상 혹은 종신형으로 대체되었다). 그 다음 20년 동안의 내무부 기록을 살펴보면 비역의 다양한 형태를 구분하고자 시도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실제로 이는 개인적 특성에 보다 가깝게 정의되었던 동성애 행위를 수간과 구분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점차 더욱 직접적인 통제에 놓였다. 라바우처가 개정한 유명한 1885년 형법 개정에 의해 남성들 간의 성추행은 최대 2년의 중노동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경범죄”가 되었고, 이는 사실상 법의 범위 안에서 남성 동성애 행위의 모든 형태를 포괄했다. 1898년 바그랜시(Vargrancy) 법은 “비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유혹하는 행위와 관련된 법을 강화했고, 이는 동성애자 남성에게만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 1912년의 추가적인 형법 개정으로 해당 조항을 위반한 데에 따른 처벌은 6개월 구금형과 함께 두 번째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즉결 심판에 따른 채찍질로 정해졌다.

 

  헨르 라바우처(Henry Labouchere)는 이러한 개정안을 도입한 동기가 남성 성매매에 관한 스티드(W.T.Stead)의 보고서에 있다고 말했고, 근본적으로 증명을 용이하게 하도록 보고서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법은 오랫동안 종신형을 내려온 소도미 법에 비하면 덜 억압적이긴 하다. 더구나 배심원들이 유죄 판결을 꺼리면서 법의 적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다. 정부 차원에서도 라바우처의 형법 개정이 공적 행위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1889년 기소국장은 성추행 사건에 관한 “불필요한 공개를 하지 않는 방편”을 언급했다. 동시에 그는 “성인 남성들이 비자연적인 취향을 사적인 곳에서 탐닉하는 것”을 허용하자고 말 할 수 있다고까지 느꼈다. 배심원들은 종종 유죄 판결을 꺼려했고, 경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공적 품행”이 심하게 훼손되지 않는 한 사적 활동에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막상 법이 적용되자, 1895년 오스카 와일드의 경우처럼 법은 매우 가혹하게 적용되었고, 1885년 법의 최대 형량인 2년간의 중노동 종종 집행되었다. 마찬가지로 유혹 행위에 대한 조항도 엄격히 적용되었다. 부랑자 단속법(Vagrancy Act)에 따른 여성 성매매에 부과된 벌금에 비해 유독 남성 동성애자는 최대 6개월 형의 엄격한 처벌을 받았는데, 특히 기소는 대개 사회적 오욕이나 도덕적 혐오감과 관련되었다. 1930년대 한 자유주의자 작가는 공공 도덕 위원회의 사적 강제가 “여성의 성매매 행위와 관련해서는 실제적인 불쾌함이나 문란한 행위가 명백한 경우에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남성에 의한 유혹의 모든 경우가 보고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법은 적개심을 유발하지는 않았지만, 성에 관한 사회적 규제의 폭넓은 개편의 일환으로 이는 특히 그 작동에 있어서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복무했다. 아마 각각의 기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종 더 선정적인 사건을 동반한 도덕적 공황의 분출이었다. 이는 특히 1895년 오스카 와일드의 “세 번의 재판”을 둘러싼 소동에서 두드러졌다. 오스카 와일드의 몰락은 “동성애자”의 공적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동성애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일탈적인 행동 뒤에 밀려드는 위험에 관한 두려워할 만한 도덕적 이야기였다. 와일드의 재판은 사실상 허용 가능한 행동과 혐오스러운 행동 사이의 분명한 경계를 그리는 가장 노골적인 낙인화 과정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물론 역설적인 효과도 있었다. 해브록 엘리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에서 “동성애의 표현에 명확성과 자의식을 주고, 성도착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취하도록 기여해왔다”고 말했다. 적용상의 다양한 변용과는 별개로 법적 규제의 새로운 형태는 동성애 성향을 지닌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 그들의 차이점을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효과를 가졌으며, 그 결과 새로운 지식 공동체(삶의 공동체나 감각의 공동체가 아니라면)가 만들어 진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후반 수 십 년간 많은 동성애자 사이에서 새로운 정체성 감각이 발전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고, 그 결정적인 요소는 논쟁의 여지없이 법적 상황에 따라 극적으로 새롭게 공적으로 부각된 동성애였다.

 

  법적 상황의 변화는 범죄의 개인화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기여한 동성애의 “의학적 모델”의 등장과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1870년대 중반 동성애에 관해 가장 널리 인용된 유럽의 작가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의 선도적인 의학 및 법률 전문가였던 카스퍼(Casper)와 따르듀(Tardieu)였는데, 둘 모두 법정에 선 새로운 “성도착자(degenerates)”를 규명(define)하고, 그들이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지 확인하는 데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문제가 영국에서도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있었던 동성애에 관한 대부분의 작업은 부분적으로나마 법조계에서 이루어졌다. J.A.시몬스(Symonds)가 개인적으로 출간한 소책자 「근대 윤리학의 문제(A Problem in Modern Ethics)」가 “특히 의학 심리학자와 법학자들”에게 다루어 질 것이라고 밝힌 것과 달리 해브록 엘리스의 『성적 도착(Sexual Inversion)』(1897)은 그 반대의 이유로 공격받았는데, 의학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았고 너무 대중적인 어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성애의 의료화(죄악이라는 관념에서 질병이나 정신 질환의 개념으로 전환)는 비록 새로운 법적 모델과 마찬가지로 그 적용이 고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중대한 변화였다. 이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과학적 담론의 축들이 수 십 년간 맹위를 떨쳤다 : 동성애는 선천적인가, 후천척인가? 치료될 수 있는가, 아닌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냉담하게 받아들여지면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동성애에 관한 그의 선구적인 연구에 있어서 자유주의자인 해브록 엘리스조차 성도착자 독자들이 그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폭력적인 반대로 설정하지” 않을 것을 경고할 필요성이 있음을 알았다), 혹은 기독교인의 의지가 지닌 모든 힘으로 이를 거부해야만 하는가? 물론 동성애 행위를 죄악이나 부도덕함으로 보는 오래된 관념은 19세기에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그것들은 동성애자가 스스로를 정의해야만 하는 경계에 대응하면서, 혹은 그 안에서 형성되는 과학적 이론에 불가분하게 얽혀있었다.

 

  사실상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선구적인 성과학자들이 한 일은 동성애가 특정한 인간 유형의 특성이라는 관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예컨대 1860년대에 칼 베스트팔(Karl Westphal)이 “반대되는 성욕”에 대해 묘사하며 동성애가 “성욕의 선천적인 전도”의 결과로 도덕적 광기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1860년대부터 선천성 이론을 선도했고 그 스스로도 동성애적 성향을 지녔던 독일의 변호사이자 작가인 칼 울리히(Karl Ulrichs)는 “우르닝(urnings)”이 남성 신체에 여성의 정신이나 그 반대의 결과로서 원래 구별되지 않는 인간 배아의 비정상적인 발달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가 대중화한 중간자적 성(intermediate sex)에 관한 이론은 울리히의 아이디어가 논리적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좀 더 과학적인 수준에서 보면, 독일의 위대한 성과학자 마그누스 힐쉬펠트(Magnus Hirschfeld)는 제3의 성(third sex)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성적 분화 발전에서 호르몬의 중요성에 대한 발견에 이를 통합시킬 수 있었다. 호르몬을 통한 설명은 엘리스의 선천성 이론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사고의 많은 부분이 동성애 옹호론자에게 채택되어 죄악이나 도덕적 취약성 이론의 경멸적인 함의에서 벗어나 동성애를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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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Jeffrey Weeks. 1996.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in: Steven Sediman(edt). Queer Theory/Sociology. Black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