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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탈)종속된 지식: 트랜스젠더 연구 입문 - Susan Stryker (1/2)

플루키 2019. 3. 28. 02:33

(탈)종속된 지식: 트랜스젠더 연구 입문

Susan Stryker

 


 

1995년, 나는 뉴욕시립대학(CUNY) 대학원 프로샨스키 대강당에서 내게 발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즈비언게이연구소(CLAGS)가 주최한 “레즈비언과 게이의 역사”라는 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였다. 랜돌프 트럼바흐(Randolph Trumbach)가 사회를 맡고 윌 로스코(Will Roscoe), 마샤 비시너스(Martha Vicinus), 조지 천시(George Chauncey), 라몬 구티에레즈(Ramon Gutierrez), 엘리자베스 케네디(Elizabeth Kennedy), 마틴 마날란산(Martin Manalansan)이 패널로 참여한 “젠더와 동성애 역할”이라는 토론에서의 일이었다. 페어리와 버다쉬(아메리카 원주민 중 두 영혼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콘 마더(Corn Mothers)와 몰리하우스, 여성들의 열정적인 우정, 부치-펨 관계, 동남아시아 게이 디아스포라 등에 관한 흥미롭고 훌륭한 발표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의하려고 기다렸다. 나는 발표자들이 스스로 지적 스타는 되었을지언정, 총체적으로 젠더 다양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관한 최근 논의를 고려하면 그들은 너무 비슷해 보였는데, 모두가 비트랜스젠더 같았다는 말이다. 광범위한 지적인 퀴어 운동의 일부로서 트랜스젠더 연구자의 새로운 물결이 도래한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도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왜 발표자 가운데 트랜스젠더가 없었을까? 왜 “젠더 다양성”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가 성적 욕망이라는 논의의 일부로만 포함되어야 하는가? 젠더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마치 잠재적인 성적 상대에 대한 일종의 매력과 접근성의 신호인 것처럼 말이다.

 

발표장에서 아무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을 심통 사나운 불평이 아니라, 게이 역사기술에 관한 분명하고 풍부한 비판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기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정돈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발표장 반대편에 있던 한 중년의 백인 남성이 반대편 마이크에 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가 관찰하기 시작한 불안한 새로운 경향에 대해 발표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말하기를, 트랜스젠더들이 자신들을 새로운 퀴어 정치학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러한 시도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다.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고, 억압적인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따르며, 반동적인 정치적 관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수년간 게이레즈비언 운동에 침투해 이를 파괴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최근의 매우 역겨운 음모였다는 점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따위의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비난이었는데, 일종의 당시 많은 문화적 좌파 사이에서 수용되곤 했던 진보적인 관점에서 트랜스젠더를 사유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순간, 온당한 분노에 휩싸여 나는 내쪽 편에 있는 마이크로 다가가 “나는 아프지 않아요.”하고 끼어들었다. 반대편의 그 남자는 멈춰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트랜스젠더고, 나는 아프지 않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떠드는 걸 듣지 않을 겁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 남성이 갑자기 뒤돌아 발표장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몇 초 동안 그와 나는 수백여 명의 게이 레즈비언 학자와 활동가들(그리고 몇몇의 트랜스들)로 가득 찬 발표장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그제서야 나는 원했던 대로 게이 역사기술에 대한 정교하고 분명하고 풍부한 비판을 개진할 수 있었다. 내가 말을 끊어서 나가버린 그 남성은 짐 푸아트(Jim Fouratt)로, 1969년 스톤월 항쟁의 일원이자 게이해방전선의 창립멤버였으며, 쇠퇴하는 뉴욕 진보 정치의 극단적 신좌파 터줏대감이었다. 트랜스젠더 야심가들의 한 대표자가 퀴어 학문 영역을 젠더 다양성의 새로운 개입에 내버린 게이해방전선의 늙은 선구자를 내려다보았던 것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이 교환은 내 공적인 삶의 몇 안 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달콤했다.

 

10년 뒤인 2005년, 나는 또다시 프로샨스키 대강당에서 레즈비언게이연구소가 주최한 또 다른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이번 주제는 “트랜스 정치학, 사회 변동 그리고 정의”였다. 약간의 비트랜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이성애자들, 그리고 수백여 명의 트랜스젠더가 발표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는 레즈비언게이연구소 자체도 설립자이자 저명한 게이 역사가 마틴 두버만(Marrtin Duberman)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법학자 페이즐리 커라(Paisley Currah)가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스톤월 항쟁이 있기 삼 년 전인 1966년에 컴튼 카페테리아에서 발생한 항쟁을 다룬 최신 TV 다큐멘터리 <울부짖는 여왕들(Screaming Queens)>을 상영할 수 있었다. 폐회식 세션에서 트랜스젠더들은 단지 듣고 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동감 있고 때로는 신랄하게 논쟁을 벌였다. 급진주의자와 중도주의자들 사이의 격렬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한 중년의 백인 남성이 끈기 있게 마이크 대기 열에 서 있었다. 물론 그 자는 짐 푸아트였다. 그는 새로운 트랜스젠더 헤게모니가 자신 같은 사람들의 경험을 주변화하고 삭제한다고, 성적 해방과 시민권 운동에 대한 수정주의 역사가 전체주의적인 열정에 휩싸여 과거를 새로 쓰고 있다고 토로했는데, 수많은 청중이 그에게 입 다물고 앉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비슷한 불평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그러한 소리를 듣는 것을 포기하고 분노로 가득한 발표장을 떠났다. 슬픈 일이었다.

 

내 개인적으로 프로샨스키 대강당에서의 두 차례의 순간은 트랜스젠더 학제의 발전 국면에 있어서 일종의 책받침(bookends)이었는데, 스티븐 위틀(Stephen Whittle)과 내가 피할 수 없는 논쟁을 불러올 법한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방식의 <트랜스젠더 연구 독본The Transgender Studies Reader>을 편집하고 있을 시기였다. 병리적으로 여겨지거나 무시되지 않고 그 관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우리 같은 주변적인 신진 학자와 활동가들의 노력은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 정체성, 욕망, 체현과 같은 학술적인 연구를 급변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역사는 사실상 다시 쓰였고, 게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학제와의 이전 관계가 다시금 정립되었으며, 젠더화 된 주체성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고, 새로운 담론과 비판적 탐구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지난 십 여 년 동안 트랜스젠더 문제에 관한 학술적인 관심은 트랜스젠더 현상을 정신 질환의 표현으로 상상하거나, 단지 상징적으로 끌린 크로스드레싱의 재현에 매료되었던 비정상적인 병리학의 영역에서부터 트랜스젠더를 물질적인 세계의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고민하는 데로 옮겨갔다. “트랜스젠더”는 십여 년의 과정을 거쳐 임상에서 거리로, 재현에서 실제로 나아갔다.

 

아마도 1990년대의 트랜스젠더에 관한 모든 것에서 가장 놀랄만한 측면은 그 용어 자체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뿌리내렸고, (언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뒤쫓았던, 혹은 갑작스레 결정된 사회문화적이고 비판적-지적인 구조에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현상을 기술하는 용어로서 “트랜스젠더”가 출현한 데에 수반한 투쟁을 고려하면 단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쉬운 길을 따랐고, 그 모든 한계와 숨겨진 논의에 있어서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우리가 말하고자 노력한 것에 가장 적합하고 널리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을 실용적인 관점에서 인정했다. 체험되고, 체현되고, 경험되고, 수행되고, 마주하는 것으로서 “젠더”라는 사실(fact)에 주의를 환기하는 광범위한 현상에 있어 대중적인 어법과 다양한 전문가 담론 모두에서 이 유행어가 1990년대 초에 선택의 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시작된 것은 현재 지배적인 유럽중심적 근대성의 섹스/젠더 이데올로기 이분법이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고 다양했다.

 

우리가 이해하기로 트랜스젠더 연구는 트랜스섹슈얼리티와 크로스드레싱, 인터섹슈얼리티와 동성애의 일부 측면, 인류의 다양한 젠더에 대한 비교문화적․역사적 조사, “젠더 비전형성(atypicality)”의 무수한 하위문화 표현들, 섹스화된 체현과 주체적인 젠더 정체성 발전의 이론들, 젠더 표현에 대한 규제와 관련된 법과 정책을 비롯한 다양한 유사한 주제를 그 범위으로 다루고자 하는 학문 영역이다. 이는 사회과학과 심리학, 물리학과 생명 과학, 인문학과 예술을 끌어들이는 간학제적 영역이다. 이는 재현의 관습만큼이나 물질적 조건에 관련되어 있으며, 종종 둘 간의 접촉에 특히 밀접한 관심을 기울인다. 트랜스젠더 연구 영역에서 형성되고 있는 젠더, 욕망, 체현, 정체성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틀은 광범위한 주제에 있어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음악학에서부터 종교학이나 디지털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트랜스젠더 현상에 목하고 있는데, 시각․조형․행위 예술의 주제나 공중 보건, 성형 수술, 사법, 가족법, 이민과 같은 분야의 현실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 연구 영역은 대개 인간의 몸을 성적으로 구분하는 생물학적 특이성, 특정 형태의 몸이 차지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내지는 지위, 젠더화 된 자아의 감각과 젠더 역할 수행에 대한 사회적 기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경험, 젠더화 된 특질의 특정한 구성을 유지하거나 방해하는 문화적 작동방식 사이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한다고 추측하는 연관성을 가시화하고, 다시금 정교화하고, 탈자연화하고, 분쇄하려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트랜스젠더 연구 영역이 단지 섹스와 젠더, 생물학과 문화에 대한 가정이나 관계의 내용 내지는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또한 그러한 가정을 만들고 관계를 구축하는 “우리”는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이를 파괴한다고 여기는 “그들”은 누구인지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역은 사람들이 그들의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경험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왜 중요한 문제인지 탐구한다. 이는 그 자체로 비규범적이고 비전형적인 젠더 인식이 종종 맞부딪치는 부정의와 폭력에 대해 꼭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런 문제에 열렬한 이해관계를 가진 우리가 정치적으로 하고자 하는 바와 관련되어 있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최선의 경우 “차이”나 “위계”가 단지 추상이 아니라는 통찰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체현된 차이의 문제를 질문하고, 그러한 차이가 어떻게 사회적 위계를 변화시키는지 분석하는 장애학이나 비판적 인종이론 같이 사회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간학제적 학문 영역과 닮아있다. 즉, 고통과 기쁨, 건강과 아픔, 처벌과 보상, 삶과 죽음을 가능케 하는 실제 몸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체계에 대한 것이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변칙적이고, 수가 적으며, 별나거나 이상하게 보이는 트랜스젠더 현상이 실제로는 그러한 현상과 이를 문화적으로 생산하고 강화하는 규범의 묶음 사이에서 형성된 관계의 효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커다란 관심이 있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젠더 규범성이 분석되지 않아도 좋을 주위 배경으로 사라지도록 하고 트랜스젠더 현상을 대단히 도드라지는 무엇으로 만드는 조건에 대한 비평을 가능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단지 트랜스젠더 현상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성의 다양한 가능성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밖의 것들을 절멸하는 제도나 체계의 작동을 드러내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 연구 영역은 희박한 트랜스젠더 집단만을 다루는 보잘 것 없는 좁은 전문화나 난해한 트랜스젠더 실천의 절충적인 수집과는 거리가 멀고, 현대 인문학, 사회과학, 생명과학 연구에서 가장 첨예한 몇몇 이슈에 대한 중요하고 지속적인 비판적 참여인 셈이다.

 


 

작은 배경

 

“트랜스젠더”라는 단어 자체는 1980년대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레슬리 파인버그(Leslie Feinberg)가 1992년에 “트랜스젠더 해방: 때가 된 자들의 운동”이라는 작지만 영향력 있는 팜플렛에 이를 사용한 뒤에야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젠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서던 캘리포니아의 버지니아 프린스(Virginia Prince)라고 여겨져 왔다. 프린스는 그녀 자신처럼 개인적인 정체성이 “트랜스베시타잇”(1910년에 마그누스 힐쉬펠트 박사가 창안함)과 “트랜스섹슈얼”(1950년대에 해리 벤자민 박사가 사용함) 사이의 어디쯤 있다고 여기는 자들을 가리키는 데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트랜스베시타잇이 이따금씩 이른바 “다른 성(sex)”의 옷을 입는 사람이고, 트랜스섹슈얼은 자신이 타어난 성별과 다른 성별에 속한다고 주장하고자 성기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킨 사람이라면,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을 공적인 재현을 통해 사회적인 성별을 영구적으로 바꾼 사람들이었다.

 

파인버그의 용례를 따르면 트랜스젠더는 전적으로 명사적이라기보다 형용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파인버그는 젠더화 된 체현의 사회적 규범과의 차이 때문에 배제되고 억압받는 자들, 따라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정의를 위해 함께 투쟁해야 하는 자들이 정치적 연합을 형성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위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고 느끼는 트랜스섹슈얼, 드랙 퀸, 부치, 허마프로다이트(hermaphrodites), 크로스드레서, 남성적인 여성, 여성적인 남성, 끼순이(sissies), 톰보이 등 이 용어로 불리고자 하는 포괄하는 상상된 공동체를 위한 “팬젠더(pangender)”의 포괄적인 용어인 셈이다. 파인버그의 팜플렛이 나온 뒤 이러한 구상에 따른 운동이 실제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점차적으로 트랜스젠더를 위한 인권과 새로운 시민권을 쟁취했으며, 십여 년 이상동안 트랜스젠더 문제에 관한 공적인 논쟁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트랜스젠더 해방 운동을 위한 파인버그의 요청은 트랜스젠더 연구에 있어 중요한 주춧돌을 놓은 분기점이 되었던 1991년 샌디 스톤의 <포스트트랜스섹슈얼 선언(Posttranssexual manifesto)>에 뒤를 잇는 것이었다. 스톤은 트랜스섹슈얼리티를 허위의식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던 페미니스트 윤리학자 재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가 열정적으로 정교화 했던 1970년대 초반 제2물결 페미니즘의 사유 흐름에 저항해서 이를 썼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트랜스섹슈얼은 젠더 억압의 사회적 원천을 적절하게 분석하는 데에 실패한다. 젠더 체계 자체를 전복함으로써 평등을 창출하려는 작업 대신 그들은 뒤떨어진 남성성과 여성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내면화하고, 그들 자신이 되고자 하는 남성과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남들이 하지 않는 신체 훼손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트랜스섹슈얼은 신경증적인 젠더 체계의 가시적인 증상이다. 몇몇 페미니스트가 주장하기를, 트랜스섹슈얼은 그들 신체의 겉모습을 바꿈으로써 그들 자신의 산 역사로부터 스스로 소외되며, 그들의 “진짜 자아”를 다른 사람에게 잘못 보여주는 거짓된 위치에 자신을 세운다는 것이다. 자기보호만이 아니라 완전히 숨막히는 옷장 속에서 뛰쳐나올 것을 요청했던 초기 게이와 레즈비언들처럼, 스톤은 비트랜스섹슈얼(다시 말해 “진짜”) 남성 혹은 여성으로 패싱하려는 실천을 버리고 진본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재구성 할 것을 요청했다. "변화하는 섹스"의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의 새로운 자료를 요청하면서 스톤은 몇몇 페미니스트 사상 조류에 내재해 있는 반트랜스 도덕주의와 대결하고자 했다. 상당 부분 파인버그의 "트랜스젠더"는 스톤의 "포스트트랜스섹슈얼 선언"이 요청하는 비판적 실천의 앙상블에서 유래했다.

 

1991년에 있었던 몇몇 주요 사건의 융합은 트랜스젠더 이슈에 대한 새로운 논쟁과 담론을 만들고 유통하는 데 공모했으며, 몇몇 낡은 것들 또한 부활시켰다. 그 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공동체에 깊은 근간을 두고 있는 여성만을 위한 미시건 여성 음악 축제는 수술한 트랜스섹슈얼 여성 낸시 진 버크홀더가 "사실은" 남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추방해버렸다. 이 사건은 대다수가 걸프전에 대한 반대, 미국 내 대중 미술 펀딩에 대한 우익의 공격, AIDS 위기를 십년 이상 방치해온 레이건-부시 행정부에 대한 반대로 급진화 되어있었던 미국과 캐나다의 트랜스젠더와 그들의 앨라이에게 폭발점이 되었다. 케이트 본스타인이라는 도발적이고 지적인 행위예술가는 "트랜스섹슈얼"이라는 말과 함께 고문받았던 개인사를 탐험하는 고백 서사로 북미의 양 해안가에서 청중들의 의식을 비틀고 있었다. 이 풀뿌리 공동체의 보다 학구적인 구성원 몇몇은 당시 출판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나 보다 오래된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1>을 읽었다. 루틀리지 선집은 그 해 줄리아 엡스테인과 크리스티나 스트라웁의 Body Guards: The Cultural Politics of Gender Ambiguity를 출간했는데, 샌디 스톤의 핵심적인 글을 포함한 이 선집은 곧 트랜스젠더 연구라고 주장하게 될 지형의 초기 지도를 제공했다.

 

1992년까지 이 분야의 미약한 시작은 학계의 여백이 정체성의 정치화 된 공동체와 중첩되는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퀴어 네이션> 샌프란시스코 지부의 초점 그룹으로 1992년 구성된 활동가 그룹 <트랜스젠더 네이션>은 1990년대 초에 너른 퀴어 운동에서 특히 트랜스젠더 정치학의 출현을 나타냈고, 미국 심리학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 "성동일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가 포함된 것에 대한 항의의 일부로서 학술적인 작업을 형성했다. Gender Trash, TransSisters, Rites of Passage, TNT:The Transsexual News Telegraph와 같은 신생 잡지는 공동체 기반의 문화 생산을 학술적인 비판적 젠더 이론과 결합시켰다. 법조계 활동가 필리스 R. 프라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법과 고용 정책에 관한 전문가 컨퍼런스를 휴스턴에서 처음 조직했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인해 중요한 업적을 비극적으로 짧게 마무리한 공동체 기반 역사학자이자 활동가인 ftm 트랜스섹슈얼 루 설리반이 구축한 탄탄한 토대 위에서, 제이미스 그린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FTM 지지 단체를 FTM 인터내셔널로 변화시켰고, 이들의 소식지는 여성의 남성성의 무수한 형태를 논의하는 데 핵심적인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단체의 구성원들 중 일부-이들 중에는 물론 대학원생이나 젊은 교수도 포함되었다-는 이름에서부터 명백히 "트랜스젠더"를 포함하기 거부했던 1993년 '게이, 레즈비언, 바이 권리를 위한 워싱턴 행진' 가운데 비공식적인 사적(personal) 전문가 네트워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성적 해방 운동의 전성기와 1990년대 초 사이에 공식적인 트랜스젠더 운동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92년, 정치적 활동가 단체 '변화를 위한 압력Press for Change'은 유럽 인권재판소에 자신의 결혼할 권리와 사적인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을 제소한 트랜스섹슈얼 남성 마크 리의 패소에 대응하면서 조직되었다. 그러나 기존 공동체와 새롭게 등장한 공동체 사이의 세대간 단절로 표상되는 미국의 정치적, 이론적 전개와는 달리 '변화를 위한 압력' 캠페인은 1970년대 중반부터 트랜스 이슈에 천착해온 트랜스젠더를 중요한 활동가로 포함시켰다. 이 활동가들은 모두 1960년대 초 로스엔젤레스에 설립된 '버몬트 소사이어티Beaumont Society'-이 단체는 명백히 버지니아 프린스의 'Hose and Heels Club'에서 파생되었다-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계하고 있었던 지역 조직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다. 비록 이러한 지지 단체는 대개 이성애자 남성 트랜스베시타잇의 욕구에 중점을 두고 있었지만, 영국에는 시간제 크로스드레서 뿐만 아니라 수술한 트랜스섹슈얼과 젠더 시스템의 다양한 틈새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한 혼합된 집단이 존재했던 중요한 역사가 있습니다. 

 

1975년, 지지 그룹 리더들의 네트워크는 느슨하게 미국 활동가 단체 TAO(Transsexual Action Organization)과 연계하고 있었다. TAO-UK는 반성차별주의, 반인종주의, 평화 캠페인에 헌신했던 단명한 단체로, 트랜스섹슈얼의 의료적 조치의 자기결정권를 요구했다. 이 초기 활동가들은 1992년 '변화를 위한 압력'의 핵심이 되었는데, 2004년 젠더 승인법Gender Recognition Act의 통과는 미국과 비할바 없는 승리의 신호였다. 퀴어와 페미니스트 정체성 정치에 보다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던 미국과 달리, 영국의 트랜스젠더 학술 작업은 애초부터 정책 지향적이고, 의학적-법적 이슈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제도적 권력의 메커니즘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변화를 위한 압력'의 영향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근본적으로 상이한 의료 전달 체계 때문이었다. 밀접한 두 학문의 차이는 트랜스젠더 현상 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현상이 어떻게 번역되고 재현되는지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국가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1994년 아이오와 대학에서 열린 퀴어 스터디 컨퍼런스는 신진 트랜스젠더 학자들의 진정한 국제 네트워크를 최초로 활성화했고, 그 결과 과 지금까지 남아있는 트랜스 학술 목록을 형성했다.  1995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열린 제1회 크로스드레싱, 섹스, 젠더 국제 컨퍼런스는 트랜스젠더 연구 영역의 발전에 또다른 기준을 제시했다. 트랜스젠더 현상을 연구해온 학계의 기성세대 전문가들(주로 비트랜스젠더)은 자신도 트랜스젠더이면서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수많은 전문가들을 컨퍼런스 미팅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트랜스젠더 참가자들은 트랜스젠더에게 다른 참가자와 분리된 화장실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거나, 트랜스젠더 학자의 발표를 "전문가 트랙"이 아니라 "커뮤니티 트랙"으로 배치하는 등 트랜스젠더 참가자를 배제하고 낙인찍는 학회 정책에 거세게 항의했다.

 

상황은 불과 몇 년 만에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트랜스젠더" 용어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된 것은 1995년경의 일로 보인다(같은 시기에, 더욱 놀라울 정도로 확산된 www에 의한 것이다). 1990년 후반까지 많은 트랜스젠더 연구 특별 이슈가 피어리뷰(심사)가 있는 학술 저널에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주제로 한 선집들도 학술 전문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젠더 퀘스쳐닝들에게 의료 및 심리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오래된 전문가 조직인 '해리 벤자민 국제 젠더 디스포리아 협회(the Harry Benjamin International Gender Dysphoria Association, 지금은 Wolrd Professional Association for Transgender Health로 이름을 바꾸었다. -옮긴이)'마저도 자체 간행물을 <트랜스젠더리즘 국제 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ransgenderism>로 이름 지으면서 새로운 명명법에 굴복했다. 트랜스젠더 연구 과목은 북미와 유럽에서 점점 더 많이 개설되었고, 트랜스젠더 학제와 문화적 생산물은 섹슈얼리티와 젠더 연구 커리큘럼 뿐만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법학과 같은 일반적인 학제에까지 통합되었다. 지금까지 300명 이상의 대학원생이 트랜스젠더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간학제적 영역은 미국의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지나 영국 가디언지the Guardian의 고등 교육 증보판에 커버를 장식했다. 지난 세기 말에 이르러 트랜스젠더 연구는 상대적으로 제도적 지원이 부족하긴 해도 확립된 학제라고 공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트랜스젠더 연구 독본The Transgender Studies Reader>(이 글이 실린 선집의 제목 - 옮긴이)이 모으고 맥락화하고자 했던 지적 작업의 본체다. 이는 지난 10년간 발전한 분야에 대한 요긴한 소개, 이 학제를 알린 초기 연구에 대한 개요, 후속세대 연구에서의 보다 정교한 분석을 위한 도약점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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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yker, Susan. 2006. (De)Subjugated Knowledges: An Introduction to Transgender Studies. 1-18. in: Stryker, Susan(edt.). The Transgender Studies Reader.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