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 사회학

[번역] 동성애의 형성 - Jeffrey Weeks (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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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동성애의 형성 - Jeffrey Weeks (2/2)

플루키 2019. 3. 27. 16:33

동성애의 형성

Jeffrey Weeks(1996)

 



  이러한 선천성 이론과 함께 성도착의 부패에 대한 환경론자의 관념도 지속적으로 퍼져갔다해브록 엘리스 같은 자유주의자가 동의했듯 동성애가 선천적이고상대적으로 무해한 이상(anomarly)”인지 혹은 도덕적 광기나 정신 질환의 증거인지에 관한 논쟁도 지속되었다동성애가 질병이라는 이론은 1930년대 이래로 강한 사회적 공명을 가졌으나이미 오랫동안 많은 동성애자는 그들이 아프다는 뿌리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오스카 와일드는 감옥에서 호색증(erotomania)”와 일시적인 정신 쇠약을 가리키는 터무니없는 성욕으로 길을 잃었다고 호소했다아일랜드의 애국자인 로저 케이스멘(Roger Casement) 경은 그의 동성애가 치료되어야 할 끔찍한 질병이라 생각했던 반면자유주의 휴머니스트이자 그의 합리주의로 명성을 얻은 골드워디 로이스 디킨슨(Goldworthy Lowes Dickinson)은 저는 장애를 타고난 사람과 같아요.”라며 그의 동성애가 불운이라고 믿었다이처럼 깊게 뿌리박힌 자의식은 종종 (꽤 미심쩍은의학 지식의 헤게모니를 수용하고그 결과 최면에서 화학요법, 1960년대의 혐오요법에 이르는 자칭 치료법을 장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의학 모델은 상당 부분 여전히 이론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고, 대부분의 의사는 보편적인 사회의 편견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으레 이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해보였다. 새로운 심리학보다는 오래된 도덕성이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모델의 존재는 동성애의 개별화를 구체화하고, 뚜렷한 동성애자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동성애에 관한 이론이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지 않게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규제의 주된 주체가 남성 동성애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형법에서 레즈비어니즘은 지속적으로 무시되었다. 라바우처의 수정 조항과 유사하게 레즈비어니즘에 관한 조항을 두려는 시도가 1921년 결국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를 참조할 만하다. 와일드가 기소되었을 때 기소국장이었던 드사트(Desart) 경은 아래와 같은 말을 곁들여 해당 규정을 반대했다. “그런 범죄가 있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서 도대체 그런 걸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는 여자들에게 이를 알린다니요. 이건 너무 심각한 골칫거리일 거예요.” 장관이었던 버켄헤드 경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천 명의 여성 가운데 999명은 이런 관습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모든 가정에... 이런 유해하고 끔찍한 의혹이 전해질 거예요.” 이런 진술 속에서 이들이 동성애 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이 상반된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남성 동성애를 통제하는 것이 여성 동성애를 통제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사회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믿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는 레즈비언 행위가 허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남성 동성애와 같은 논쟁의 영역에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적 규제를 개선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작동했던 고려사항 중 적어도 몇 가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선입관이다. 사회적 통제의 간단한 프로그램의 위치를 밝히려는 노력정도로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동성애를 향한 태도의 변화는 종종 다른 큰 변화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보인다. 전통적인 전제들이 새로운 범주화와 마주하고 그 일련의 교차적인 영향으로 함께 변화해 갔다.

 

  여기서 중요했던 요소는 19세기 후반 남성의 정욕이라는 위험과 공공질서의 필요성에 관한 사회정화운동이 다시금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1880년대 사회정화운동 운동가들이 성매매와 남성 동성애를 남성 욕망의 구분되지 않는 산물로 보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1880년대 이래로(라바우처의 형법 개정, 1898년 부랑자 처벌법, 1912년의 형법 개정) 남성 동성애에 영향을 주는 주된 법안은 보편적인 도덕을 재건한다는 측면이 있었고, 또 일차적으로는 여성 성매매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성매매와 남성 동성애를 연구하기 위한 단일한 정부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의회에서 형법 개정이 서둘러 통과되기 전인 1885년 토론에서 남성 동성애 행위는 어린 소녀를 타락시킨 사람들의 행동과 매우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한 편으로 특정 종류의 남자가 가진 통제되지 않은 욕망에, 다른 한 편으로는 결혼 생활에서 필수적인 존엄한 성적 유대에 있었다.

 

  여기에 분명히 이질적인 몇 가지 주제들이 개입되어 있는데, 이는 특히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대한 새로운 태도의 영향을 보여준다. 1880년대에 브리스톨 클리프턴 대학 교장이었던 J.M. 윌슨(Wilson) 목사가 읊조렸듯이 문명화의 진전은 순결을 향했다. 자아(the self)와 국가를 해치는 육욕의 죄가 이를 위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연습해서 네 의지를 키워라.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아서 네 육욕을 억눌러라. 모든 사치와 나약함(effeminacy), 모든 유혹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그러한 믿음과 권고가 동성애에 대한 토론과 반응에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클리블랜드 거리에 위치한 성매매 집결지를 둘러싼 1889년과 1990년의 소동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경우에서도 역시 젊은이의 타락이 주된 쟁점이었다. 클리블랜드 거리의 소동에 대한 반응으로 기소국장은 “성인 남성의 비자연적인 육욕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 법을 집행하고 공공 서비스에 포함되는 점잖은 부모의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에 대해 말했다. 미성년자의 유혹을 막기 위해 소녀들의 동의 연령을 16살로 상향시키려는 노력은 그런고로 남성 동성애 행위에 대한 규제와 비슷했다. 20세기 신화에서 동성애자는 전형적인 성적 존재, 즉 그의 존재가 섹슈얼리티로 충만해있는 사람으로서 그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젊은이를 타락하게 하는 위협이었다.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자”가 남성 동성애자에게 가장 만연한 고정관념이었던 것이다.

 

  동성애를 향한 태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제국주의 정서와 관련되어 있었던 태도의 중요한 콤플렉스 또한 동성애를 향한 태도가 발전하는 국면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단지 타락이나 퇴폐라는 관념뿐만 아니라 제국의 안보에 있어서 가족의 근본적인 중요성에 관한 복잡한 패턴이 존재했다. 기븐(Gibbon)이 묘사한 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에서부터 1960년대 동성애 법 개정에 반대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에 대한 태도는 오랫동안 제국의 쇠퇴에 대한 공포와 연관되어 있었다. 1880년대에는 더 이상 그러한 관련성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정화운동 지지자에게 가족과 국가의 쇠퇴를 위협하는 것은 정욕(lust)이었다. “로마는 멸망했고, 다른 나라들도 멸망했다. 잉글랜드가 몰락한다면 그 죄악(sin) 때문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그를 파괴할지어다.” 가족과 부부 생활의 필수적인 성 생활에 대한 청교도인의 강조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해독제와 몰락의 공포에 대한 대응책을 제공했다.

 

  하지만 강조되어야 하는 더 전반적인 요인이 있다. 동성애는 일반적 범주로서 섹슈얼리티가 대중적 중요성을 가질 때에만 사회적 문제가 된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자연적인” 섹슈얼리티, 특히 사회정화 담론에서 부부 간 유대의 신성함에 초점을 맞추는 19세기의 논쟁은 그 필연적인 반향으로 혼외 섹슈얼리티에 대한 보다 세련된 통제를 요구한다. 소도미는 재생산과 관련된 섹슈얼리티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포괄적인 용어이자 설명이나 법적 범주로서의 특성이 모호한 오두막이다. 19세기 말 크라프트 에빙과 다른 이들로부터 대단히 복잡하게 묘사된 동성애와 여타의 범주들은 모든 형태의 섹스에 있어서 전반적인 위험과 쾌락, 또 출산과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혼인 관계를 공고히 하는 섹스의 특권적인 역할에 있어서 쾌락과 위험을 이야기했다. 신성한 결혼이라는 특권적인 영역에서 섹스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인화 되고 섹스의 분별과 “통제”가 체면의 표식이 되면서, 변형된 형태의 섹스는 언제나 세련된 정의와 통제 그리고 토론과 분석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성적 공간 또한 제공했는데, 뚜렷한 성 정체성에 대해 특히 그랬다. 필연적인 반사효과로 동성애에 관한 인식이 늘어나고, 동성애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세부적인 조직과 통제가 동반되었다. 그리고 이는 차례차례 독특한 동성애 정체성의 성장을 이끄는 저항과 자기정의의 요소를 만들어냈다.

 

  동성애는 다양한 사회에 존재해왔지만 오직 일부 문화에서만 독특한 하위문화를 구성했고, 오직 현대 문화에서만 대중적이게 되었다. 중세 시대와 전후 시기에도 동성애 행위는 되풀이되었지만, 단지 어떤 폐쇄적인 공동체에서만 제도화 되어왔을 것이다. 예컨대 많은 고해신부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몇몇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몇몇 기사 계층에서, 제임스 1세나 윌리엄 3세 같은 군주의 궁궐에서, 그리고 연극계나 프린지 문화 활동 같은 곳에서 말이다. 그 외의 동성 간의 접촉은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이름 붙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 광범위하고 개방적인 하위문화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에 생겼을 테다. 14세기와 15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남성 동성애 하위문화의 일부 형태가 존재했던 마을이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17세기 후반까지도 다양한 사회계층을 결합시키는 대중적인 하위문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1700년대 초 런던에는 개방된 공간이나 남색 사창가, 화장실 등과 관련된 동성애 하위문화가 겹쳐진 특유의 네트워크 흔적이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시장”으로 알려진 이 네트워크는 “결혼 시장”이라는 용어에서처럼 당대의 이성애 관습을 부분적으로 반영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하위문화의 형성이 가진 특성이 분명해졌는데, 이를테면 동료 관계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사이에서의 돈과 서비스의 교환이라거나 성매매의 형태를 한 조직 같은 것이었다. 이런 하위문화에 자주 또는 정기적으로 참가하는 자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전문가”인 듯 했다. 18세기의 재판 증거는 모든 사회 계급의 다양한 남성이 하위문화에 함께했지만, 자신의 삶 전체를 그렇게 조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음을 암시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동성애자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출현을 볼 수 있다. 1860년대부터 시인이자 비평가인 존 애딩턴 사이몬드(John Addington Symonds)는 유럽에 등장한 도착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고심하고 있었다. 1883년에 자체적으로 출간한 그의 논문 「그리스 윤리의 문제(A Problem in Greek Ethics)」은 동성애를 고대 그리스의 유효한 생활 방식으로서 검토했는데, 이러한 그리스 이상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일지언정 동성애자로 스스로 정체화한 20세기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1891년 자체적으로 출간한 그의 논문 「근대적 윤리의 문제(A Problem in Modern Ethics)」는 법 개혁을 위한 최신 견해와 주장을 종합한 것이다. 해브록 엘리스와 함께 그는 『성적 도착』이라는 주체에 관한 영국 최초의 포괄적인 연구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이 책은 그가 죽은 뒤에야 출간되었고, 그의 가족이 동의를 철회해서 엘리스의 이름만 실렸다. 비록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지만, 사이몬드가 남들이 가지 않았던 삶의 방식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와 그의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서클은 그의 경우 정치사회적 헌신과 관련된 독특한 동성애 정체성의 발전이라는 다른 예를 제공한다. 1890년대부터 그는 그의 파트너 조지 메릴(George Merrill)과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동성애자의 삶을 살았다.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서클 또한 동성애자로 산다는 감각을 발전시키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사례를 만들었다. 조지 세실 아이브(George Cecil Ives) 같이 서로 연결된 이러한 서클 출신의 인물들은 후에 20세기 초에 발전하기 시작한 작은 규모의 동성애 개혁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법적‧도덕적 억압에 맞서 “대의(the Cause)”를 위해 싸우는 자신을 발견했다.

 

  동성애 세계의 기조는 모순적이고 모호했다. 더 넓은 사회 영역 내에서 성공적인 동성애자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삶 전체가 법적 억압에 의해 틀지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잭 사울(Jack Saul)은 1889년 증언에서 이렇게 답했다.

 

“경찰에게 쫓기고 있었나요?”

“아니요, 그들은 결코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나에게 항상 친절했어요.”

“당신들의 수치스러운 행태에도 그들이 눈을 감았다는 뜻인가요?”

“그들은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눈을 감아야 해요.”

 

 

  아마도 법적인 상황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동성애 행위에 들러붙은 사회적 낙인이며, 이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소규모의 비밀스러운 동성애자 개혁 운동의 발전은 사회적으로 중요했다. 범죄학자 조지 세실 아이브의 삼천 단어 분량의 일기장에 따르면 그와 관련된 서클인 ‘카이로네이아의 수도회(The Order of Chaeronea)’는 1890년대 초반부터 법적 어려움을 겪는 동성애자를 활발히 돌보았다. 이 단체는 비밀과 충성심을 고집하며 거의 프리메이슨과 같은 방식과 관행을 발전시켰고, 국제적인 “지부”를 성장시켰다. 아이브나 로렌스 하우스만(Laurence Housman) 같이 수도회의 참여한 상당수는 영국 성 심리학 연구회( the British Society for the Study of Sex Psychology)에 활발히 참여했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를 전반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연구회의 주요 강령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에 관한 법을 개정하는 것이었으며, 1920년대에는 성 개혁을 위한 국제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비록 대개 동성애자들이 설립하고 운영했지만, 이러한 운동의 특징은 동성애 조직임을 표방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반대로 공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그들의 능력이 그들이 거둔 성공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분명히 “근대적인” 남성 동성애 정체성이 눈에 띄게 나타났지만, 여성 동성애가 여기에 상응하는 관념에 도달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레즈비언 정체성은 훨씬 더 불명확하게 정의되었고, 레즈비언 하위문화는 남성 동성애자에 비해 매우 적었는데 그나마도 상위 계급이나 문학 작품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베를린과 파리에는 이들이 만나는 장소가 생겨났으며 나탈리 클리퍼드 바니(Natalie Clifford Barney)의 파리 살롱과 관련된 레즈비언 문인 집단에 관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 금세기 초반 동성애자의 삶의 연대기에는 “런던 여성 증기 목욕탕”과 같이 레즈비언들이 만나는 공간이 언급되어 있으며, 1920년대부터는 부유한 레즈비언들은 새로 생긴 나이트클럽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즈비언의 존재가 가장 잘 기록된 사례들이 대개 참가자 가운데 반항적으로 “외양과 태도가 남성적인” 자를 가리키고 있는 점은 눈여겨 볼만 하다. 예컨대 소설가 래드클리프 홀(Radclyffe Hall)은 남성적인 외양으로 악명 높았다. 래드클리프 홀이 잘 알고 있었듯, 자신의 정체성을 격렬하게 주장하는 것만이 주목받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옷을 입고 전통적인 의견을 무시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레즈비언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 여성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고, 아마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20세기 초 성과학의 열정적인 범주화조차 여성 동성애에는 거의 미치지 못했다. 1901년 크라프트에빙은 레즈비어니즘에 관한 단 50개의 사례만이 있었다고 지적했으며, 심지어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도 동성애에 관한 두 명의 현대적인 작가는 “레즈비언에 관한 과학적인 문헌은 매우 드물다”고 지적할 수 있었다. 마그누스 힐쉬펠트와 해브록 엘리스처럼 이 주제에 과학적이고 논쟁적인 관심을 가졌던 작가들조차 그 이상의 정보나 자신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많은 레즈비언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레즈비언 행위에 대한 그 어떤 법적 규제도 없었고 그에 따라 대중적인 비판이나 추문도 없었던 것은 여성 동성애의 사회적 인지가 대단히 낮은 데에 따른 것이었으나,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무관심의 기본적인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속할 것이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상이한 사회적 가정들, 특히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과 정확히 관련되어 있다. 레즈비언 아내를 두고 있었던 해브록 엘리스는 여성 동성애자들이 종종 남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고, 래드클리프 홀이 1928년 출간한 레즈비언의 사랑을 다룬 소설 <고독의 우물(The Well of Loneliness)>에서 진짜 동성애자(invert)는 “남성적인” 여성이다. 소설에서 이름과 행동이 남자 같은 스테판은 그녀의 본성, 즉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본질의 고뇌를 견디라고 강요받았던 반면 여성스러운 마리는 끝내 이성애 결혼 생활을 택하고 만다.

 

  레즈비언의 남성성에 관한 이러한 관심은 여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압도적인 전제 하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존 가농(John H. Gagnon)과 윌리엄 사이먼(William Simon)은 “일부 동성애자 여성의 공공연한 성적 행동 패턴은 이성애자 여성을 닮으려는, 그리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남성의 성적 패턴과 급진적으로 달라지려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몇 가지 서로 얽힌 요소들은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태도와 레즈비언 정체성을 위한 필연적인 가능성을 결정했다. 이를테면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 이를 명백히 하고, 조직하고, 규제하는 이데올로기,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서 여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 여성이 주체적인 섹슈얼리티를 개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가능성 말이다. 주체를 개념화하려는 시도를 막는 압도적인 장벽은 여성 섹슈얼리티를 “모성 본능”의 관점에서나 남성의 자극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으로서 정의하는 지배적인 관념이었다. 이데올로기는 레즈비어니즘을 과학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조차 제한했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특유의 레즈비언 정체성이 쉽게 출현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존경받는 젊은 여성들에게조차 “독립적으로”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레즈비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성의 일반적인 세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갔을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일기와 편지 등 풍부한 증거에서 알 수 있듯, 여성들은 일상적인 문제로 다른 여성과 오랜 감정적 유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관계는 힘을 주는 가까운 자매간의 사랑부터 청소년기의 열정, 그리고 영원한 애정을 성숙하게 공언하는 데까지 다양하다. 레즈비언에 관한 초기의 많은 작가들은 여성 동성애자 사이에서 독점적인 성적 행위 대신 육체적 온기와 위안을 주는 포옹과 키스, 그리고 손을 잡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분명히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모든 여성 사이의 연속적인 무엇이었다. 깊고 열정적인 사랑의 선언은 그 어떤 성적 표현의 흔적 없이 반복된다. 여성의 “정상적인” 섹슈얼리티와 “비정상적인” 섹슈얼리티의 양 극단을 가르는 기준은 실제로는 거의 없었으며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범주를 통해 여성 동성애를 탐구하려는 시도는 주제넘은 일이 되었다.

 

  1920년대에 새로운 전문직 여성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인지할 수 있는 레즈비언 정체성이 처음으로 가능해진 점은 주목할 만한데, 심지어 일련의 선정적인 추문에 따라 레즈비어니즘은 1920년대의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댄서 마우드 알란(Maud Allan)이 자신을 성 도착자인 독일 부역인 명부에 실었다는 이유로 우파 국회의원 노엘 펨버튼 빌링(Noel Pemberton Billing)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사건은 헤드라인을 레즈비어니즘으로 장식했다. 앞서 본 것처럼 1921년에는 레즈비어니즘을 형법에 포함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일련의 소설, 심지어는 영화까지도 레즈비언의 경험을 묘사했는데, 예컨대 1928년에 래드클리프 홀의 레즈비언 소설 <고독의 우물>이 금서로 지정되고 기소된 것은 가장 유명한 사건이었다. 공표자로 나선 버켓 경(Lord Birkett)이 나중에 지적했듯이 최고수도치안판사인 샤르트르 바이런(Chartres Biron) 경은 래드클리프 홀이 “이러한 (동성애)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낙인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소설에 대단히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소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대중적으로 홍보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아마도 이 사건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을 텐데,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대중적 인식은 1921년에 드사트 경과 버켄헤드 경이 무언의 희망을 부인한 것 그 이상이었다. 수천여 명의 레즈비언 성향의 여성이 래드클리프 홀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당시 그 누구보다도 레즈비어니즘에 이름과 형상을 부여한 사람이었다. 후세대 레즈비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고독의 우물>을 읽을 때... 이건 내게 계시처럼 다가왔어요. 모든 문장이 내 얘기 같았죠. 나는 눈물범벅이 되었고 내 동성애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었어요.”

 

  동성애에 관한 그 어떤 연구에서도 인지해야 할 중요한 지점은 자아나 정체성에 관한 개인적인 감각과 사회적 범주 사이에 자동적인 관계는 없다는 것이다. 동성애 활동에 주어진 의미들은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사회적 계급, 지리적 위치, 젠더 차이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그 의미는 변화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언제나 일탈적인 방식으로 정의되어 있는 동성애를 탐구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행위의 내재적인 본성이 아니라 그 행동이나 그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둘러싼 의미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점이다. 지난 100여 년간 “동성애의 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억압적인 정의와 방어적인 정체성과 구조가 동시에 진행되어왔다는 데에 있다. 성적 변이에 대한 통제는 동성애 행위를 억제하기보다는 차라리 필연적으로 이를 강화하고 재구성해왔다. 개인적인 불안이나 죄책감,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도덕적 규제의 대가는 대개 가혹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너무나 쉽게 무시해왔던, 그러나 복잡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저항과 자기 정의(self definition)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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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Jeffrey Weeks. 1996.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in: Steven Sediman(edt). Queer Theory/Sociology. Black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