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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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탈)종속된 지식: 트랜스젠더 연구 입문 - Susan Stryker (2/2)

플루키 2019. 5. 24. 20:19

(탈)종속된 지식: 트랜스젠더 연구 입문

Susan Stryker

 


 

더 넓은 맥락들

 

트랜스젠더 연구의 출현은 친밀하고 때로는 성가신 관계에 있었던 퀴어 연구(queer studies)의 부상과 거의 맞물려 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미국에서 퀴어 연구의 등장에 대한 영향력 있는 해석은 에이즈 위기로 인해 섹슈얼리티, 정체성, 공적 영역 사이의 관계를 깊이 재사유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이즈를 동성애 혐오적인 "게이 질병"으로 묘사하는 데 반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체와 섹슈얼리티(게이 남성 등)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유행병에 비슷하게 영향을 받는 다른(때로는 중첩되는) 지지층 사이의 전략적인 정치 연합을 촉진하는 포스트 정체성의 성 정치가 필요했다(유럽의 아프리카계 난민들, 미국 내 아이티인들, 혈우병 환자들, 주사 약물 사용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퀴어" 정치는 차별에 취약한 특정한 소수 집단만을 보호하는 대신 "이성애규범적인heteronormative" 사회적 억압에 대한 일련의 반대에 기반하여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퀴어 운동은 트랜스젠더들 또한 억압적인 이성애규범 체제에 맞서는 정치적 불만을 가진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가능하도록 했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그러한 정치적이고 지적인 동요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트랜스젠더 연구가 학계에 처음 출현했던 지난 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 모두는 현대 젠더의 살아있는 복잡성을 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달하지 못 했다.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는 제1물결 아프리카계 미국인 페미니스트인 소저너 트루스의 유명한 질문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사회적 평등을 위해 싸우고, 여자다움의 가치를 주장했던 것만큼이나 "여성"이라는 용어의 재현(representation)을 두고 싸웠던 것이 페미니스트 전통의 일부였다는 점을 강력하게 상기켜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성"이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다른 여성을 희생시키면서, 특정한 계급, 인종, 민족, 종교 혹은 일부 페미니스트의 이데올로기적 의제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동원되어 왔다. 즉,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페미니즘에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려는 싸움은 노동계급 여성, 유색인종 여성, 레즈비언 여성, 장애인 여성, 포르노그래피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여성, 합의 하에 사도마조히즘을 실천하는 여성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투쟁들과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 이슈와 씨름하는 것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개념적 토대에 내재한 몇 가지 배제적인 전제를 재검토 혹은 어쩌먼 처음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트랜스젠더 현상은 "여성" 범주의 통일적인 잠재력에 도전하고, 젠더 불평등에 근거한 부정의와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한 새로운 분석과 전략, 실천을 요청한다. 

  근래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학제처럼 퀴어 정치와 퀴어 연구 또한 트랜스젠더 현상으로 인해 상당한 정도로 근본적인 개념적 틀이 문제가 된 채 남겨져 있다. "동성애"를 "이성애"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인 "성적 대상 선택"은 특히 대상의 "젠더" 측면에서, "대상"의 "섹스"가 의문에 빠지면서 엄밀한 범위의 일관성을 상실한다. 퀴어 연구는 반(反)이성애규범으로 여겨지지만 동성 대상 선택이 이성애중심적인 문화적 규범과 다른 유일한 길이 아니며, 트랜스젠더 현상 또한 반(反)이성애규범일 수 있으며, 혹은 트랜스젠더 현상이 반(反)이성애규범성의 대상 선택 모델로 포섭될 수 없는 차이의 축을 구성한다는 점을 때때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결과, 퀴어 이론은 때로 "동성애규범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영속화하는데, 이는 이성애사회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성애적 방식에 대한 특권화나 퀴어한 차이의 다른 형태들에 대한 반감(혹은 적어도 경솔한 무지)을 뜻한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여러 면에서 욕망과 섹슈얼리티보다는 체현(embodiment)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더 익숙하며, 정체성 기반 운동이나 공동체 내에서 인종, 계급, 장애, 민족성과 같이 교차하는 이슈의 중요성을 주장하려는 여타의 노력들과 유사하다. 트랜스젠더 현상은 퀴어 연구, 그리고 게이와 레즈비언 공동체에게 몸, 정체성, 욕망이 뒤섞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시 살펴보도록 제안한다. 

  1990년대 초반에 출현한 트랜스젠더 연구는 단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내의 특정한 지적 경향과의 절합 속에서만이 아니라 더 넓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다. 소련의 해체, 냉전의 종말,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부상, 최초의 다국적 정부로 발전한 EU,  EU의 발전, 그리고 이 시기 동안의 자본의 새로운 세계적 형태로의 정교화는 다양한 개념적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단히 의욕적인 재검토가 넘쳐나도록 재촉했다. 다른 문화적 구조들과 마찬가지로, 섹스/젠더 체계는 새로운 물질적 환경에 발맞추어 변형되고 교정되었다. 인기 있는 영화이자 연극 작품인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미국 군인의 아내가 되기 위해 (실패한) 성기 전환 수술을 받고 나중에 그 결정을 후회하는 한 동독 남성의 이야기)는 냉전 이후 젠더화 된 체현(gendered embodiment)의 가능성의 변화를 정확하게 탐색한다. 

  만약 "동양/서양"이라는 총체화하는 틀이 디아스포라 운동과 초국가적인 흐름으로 인해 점차 구조화된 것처럼 보이는 9.11 이전의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잠깐이나마 설명하는 수단을 잃었다면, 동시에 그와 대등하게 패권적인 구조인 "여성/남성"이 방해받지 않고 남아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트랜스젠더 연구는 신세계 질서(the New World Order)를 위한 젠더를 재개념화 하기 위해 파열된 이분법을 대신했다. 이 새로운 영역은 젠더를 추정상 자연적이고, 안정적인 두 가지 이질적인 생물학적 섹스(여자와 남자)를 규범적이고, 확고하며, 또한 이질적인 두 가지 사회적 범주(여성과 남성)와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체계로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식론적 틀 전체를 문제 삼으면서, 인간 존재의 수 없이 다양하고 독특한 형태를 다층적 의미의 축을 따라 생산하고, 강요하며, 제한하는 또 다른 지구적 체계로 젠더를 이해했다. 첫 번째가 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세계에서, 트랜스젠더 연구는 젠더화 된 인간성의 주요한 형태를 열거함에 있어 과거의 두 가지를 포함시키고자 고심했다(??).

  더구나 2000년이라는 세기적 사건이 임박한 1990년대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로 익숙한 이분법이 붕괴되고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감각이 비판적 관심과 곧잘 이어졌다. 가장 최근의 세기말에 트랜스젠더 현상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발흥하는 "포스트모던" 상태의 전조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리타 펠스키는 지난 세기의 끝에 트랜스젠더 이슈가 다소간 주목을 끌었던 것은 "새천년 직전의 긴장"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세기말은 곧 죽음과 부활, 몰락과 재생이라는 신화를 표현하는 특권적인 문화적 순간이었으며, 우리의 역사적 시대에서 이러한 염려는 트랜스젠더 신체에 대한 급증하는 재현을 통해 광범위하게 쓰여왔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는 "사이보그"와 같이 인간, 혹은 포스트휴먼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득한 미래를 상상하는 당대의 문화를 통해 과잉 결정된 구조가 되었다. 새로운 생체의학과 통신기술이 가져올 상상하기 힘든 변혁의 약속 및 위협과 함께, "트랜스젠더 연구"는 우리를 21세기의 멋진 신세계로 이끌어줄 하나의 집합적인 사고 실천으로서 이 역사적 시점에 출현했다.

 

 

포스트모더니티

 

트랜스젠더 현상은 어쩌면 그것이 현대의 근대성(contemporary modernity)을 넘어선다고 상상되는 만큼 "포스트모던"한 것일 수도 있으나, 트랜스젠더 비판 이론은 엄밀하게 따지면 매우 좁은 의미에서, 즉 이것이 젠더를 단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물질적인 섹스의 사회적, 언어적, 주체적 재현으로만 취급하는 근대적 인식론을 비판의 목표로 할 때 비로소 포스트모던하다. 트랜스젠더 비평의 핵심에는 인식론적 관심이 자리 잡고 있고, 이는 사회 정의를 향한 트랜스젠더 투쟁을 상당 부분 추동한다. 요컨대, 트랜스젠더 현상은 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정당한 지식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한 다른 이해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킨다. 이러한 철학적 쟁점은 트랜스젠더의 삶의 질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토대-상부구조라는 근대적인 인식론 패러다임에서, 섹스는 그 반영인 젠더의 기호(sign)를 지지하고, 그를 통해 알려지는 안정된 참조점으로 간주된다. 이는 문화 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식의 거울 이론"이라고 불렀던 것의 특수한 사례로, 재현이란 그 외부에 있다고 가정되는 객관성의 주관성을 위한 복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오랜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물질적 세계가 재현의 거울을 통해 반영된다는, 15세기 말부터 서구 유럽 사회에서 과학적 유물론이 대두되면서 그 힘을 얻어온 인식론적 주장은 "근대적"이다. "물질"은 이 근대적인 유럽 세계관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는 지식의 근원이며, 인간 인지와 지각의 파생적이고 이차적인 실천을 통해 그것에 (재)투자된 의미의 근본적인 원천이다. 

  상식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부학적 섹스의 물질성은 사회적으로는 젠더 역할에 의해, 그리고 주체적으로는 젠더 정체성으로서 재현된다. (생물학적) 남자는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사회적) 남성으로 정체화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순환적으로 스스로 여성이고자 하는 자이다. 신체적인 섹스와 젠더 역할, 주체적인 젠더 정체성 사이의 관계는 엄밀하고, 자동적이고, 모방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실제와 그 반영으로 상상된다. 우리가 재현의 거울로 볼 때 젠더란 단순히 우리가 신체적인 섹스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는 질문받지도, 질문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다. 트랜스젠더 현상은 물질적인 지시 대상인 "섹스"의 안정성, 그리고 "젠더"의 언어적, 사회적, 심리적 범주들과의 그 불안정한 범주의 관계 모두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체적으로 인터섹스인 사람의 모호한 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의미로 증명하는 것처럼, 어떤 섹스이건 "섹스"는 "하나가 아닌" 범주이다. 오히려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체의 섹스라고 불렀던 것, 즉 각각의 모든 개별 신체를 고유하게 특성화하는 균질한 속성으로 상상했던 것은 염색체의 섹스, 해부학적 섹스, 생식적 섹스, 형태학적 섹스 등 수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들은 둘보다 많은 수의 다양한 독자적인 몸적 집합체를 형성할 수 있고, 형성한다. 몸의 "총체성"과 그 섹스의 "동일성"은 그 자체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이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트랜스섹슈얼의 상반된 주관적 정체성, 트랜스베시타잇의 의복적 실천, 부치와 퀸의 젠더 도치는 모두 젠더라는 문제에 있어서 물질 결정론과 거울 형식의 재현적 실천에 대한 단순한 관념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사과가 거울에 비친 빨간 과일의 토대인 것과 같이 섹스가 젠더의 토대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섹스"는 우리의 몸이 어떤 의미인지(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의식이나 시야에 어떻게 자리 잡는지에 대한 뒤섞인 이야기이자 혼합물이다. "섹스"는 토대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인식론적 구조 기획에 의해 발굴된 공간을 차지한다. 

  거울 형식의 재현은 도덕적인 극을 구현한다. 이는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고, 정확할 수도 오류일 수도 있다. 재현/젠더 및 지시물/섹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의적인 오도된 재현은 그 결과에 있어서 우려스러운데, 이는 때로 대중문화의 풍경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크로스 드레싱 소극과 같이 겉으로 보기엔 익살스러운 것이지만, 때로는 훨씬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특정한 생물학적 섹스와 그에 따른 사회적 젠더 사이에 전제된 관계를 문제시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종종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근본적인 물질적 진실을 거짓으로 표현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의 젠더 표현은 깊고, 본질적인 진실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거짓처럼 보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 의미상 "나쁜" 사람이다.

  무고하고 의심하지 않는 타인들을 꾀어내는 거짓을 저지른 이른바 인식론적 죄악으로 말미암아 비전형적인 젠더의 사람들은 때로 그들의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 힐러리 스웽크는 살해된 트랜스젠더 청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브랜든 역을 맡아 1999년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으며,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이 극심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저류를 상징하게 되었다. 트랜스젠더에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은 상대방의 젠더와 성기가 일치하지 않아 부당하게 속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변명하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정부와 사회는 개인을 감옥,  약물 중독 거주지 치료 프로그램, 강간 위기지원 센터, 홈리스 보호소 등에 어떻게 배정할지 결정할 때 기준으로 공적 젠더나 주관적 젠더 정체성이 아닌 성기 상태를 활용하면서 유사한 폭력을 저지른다.  트랜스젠더 연구의 한 가지 중요한 임무는 섹스/젠더 관계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고 재현상 사실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틀과 재현의 실천 방식을 확립하고 보급하는 것이며, 이때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은 가난이나 인종차별주의 같은 여타 폭력의 구조적 형태와 연결될 수 있다. 이 지적인 작업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의 흐름을 막고, 트랜스젠더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심대하게 추동되었다.

 

 

수행성

 

주디스 버틀러의 연구로 젠더 분야에 일반적인 적용 가능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입증된 언어학적 "수행성" 모델은 트랜스젠더를 위한 사회 정의 의제를 촉진하는 데 유용할 수 있는 비참조적 혹은 사후참조적인 인식 틀을 제공하기에 트랜스젠더 연구에서 분명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수행성 개념은 언어행위 이론(Speech act theory)에서 파생되었고, <말을 가지고 일을 수행하는 방법How to Do Things with Words>에서 J.L. 오스틴이 진행한 철학적이고 언어학적인 작업에 지적인 빚을 지고 있는데, 이는 때로 수행(performance) 개념과 혼동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특히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ies that Matter> 등 초기 연구에서 버틀러가 젠더는 드랙 실천과 같은 "단지" 수행이며, 따라서 "진짜"는 아니라고 시사했다는 이유로 일부 트랜스젠더 학자와 커뮤니티에게  비판받았다. 생각건대 버틀러는 그가 젠더를 의지에 따라 바꾸거나 재교정할 수 있다고, 누군가의 쾌락이나 변덕에 따라 의상처럼 입거나 벗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다소간 잘못된 해석으로 비판받았다. 이러한 비판적 개입에서 핵심은 많은 트랜스젠더의 자기 이해인데, 그들은 그들의 젠더화 된 자아에 대한 감각이 그들의 기교적인 의지에 좌우되지 않으며, 떨쳐낼 수 없는 것이며, 연극의 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자아에 대한 그들의 젠더화 된 감각을 존재론적으로 불가피하고 박탈될 수 없는 것으로, 그들에게 이와 달리 제안하는 것은 그들의 인격과 특정한 그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심대하게 잘못된 인식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본다.

  언어행위 이론은 구조주의자들과 달리 언어가 단지 부정적인 차이의 추상적 체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언어는 언제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특정한 언어 행위(speech acts)로 인해,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달성된다는 것이다. 발화는 사회적이다. 발화는 반드시 특정한 발화자와 청자를 포함하며, 언어 외적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탈각될 수 없다. 수행문은 언어행위의 한 형태이다. 명백히 참이나 거짓으로 대응되는 사건의 상태나 양상에 대한 정보의 전달을 포함하는 서술적 언어 행위(예를 들면 "사과는 빨갛다")와 대조적으로 수행문은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는다. 이는 기술하거나 보고하지 않는, 따라서 참이나 거짓일 수 없는 발화 형태이다. 이는 행위 자체를 하는 것, 혹은 그 일부분이다. 수행적인 언어 행위의 예로는 맹세("I do."), 결혼("나는 지금 너를 남편과 아내로 선언한다."), 성인식을 치르는 것("오늘부터 나는 남자다.") 등이 있다. 젠더가 수행적인 행위라는 말은 그것이 의미를 갖기 위해 물질적인 지시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며, 의사소통을 위해 다른 이를 향하는 것이며, 위변조나 검증의 대상이 아니고, 어떤 "존재" 이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행하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수행적으로 말하자면, 여성은 자신이 여성이라고 말하는 자이며, 나아가 여성이 의미하는 바를 행하는 자이다. 생물학적으로 섹스화 된 몸(sexed body)은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데, 이는 그것이 발화 행위의 근거로서 물론 존재하지만 수행적인 젠더와의 결정론적 관계를 갖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젠더를 수행적인 행위로 개념화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 더 큰 질문을 제기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쓴 장 프랑스아 리오타르에게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경합의 장(field of agonistics) 안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그리스어로 agon은 "언쟁을 벌인다"는 뜻이다). 놀이일 수도, 어쩌면 전투일 수도 있는 언쟁은 서로 상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교환의 형태와 몇몇 규칙을 반드시 포함한다. 이 모델에서 언어 행위는 가장 작은 경합의 단위인데, 이는 각기 다른 종류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 안에서 발생하며, 각각은 고유한 진술의 체계를 갖고 있어서 마치 포커와 체스가 다른 것과 같다. "언어 게임" 모델은 수행적인 언어 행위 모델과 같이 1990년대 트랜스젠더 연구의 출현에 있어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형식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각각의 언어 게임은 특정한 행위자, 혹은 발신자, 수신자, 참조자와 같은 "포스트(posts)"를 갖는데, 각각은 발화 행위가 발생하는 유형에 따라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라는 서술적 언어 행위는 정보를 아는 위치에 있을 발신자에 의해 말해지며, 수신자는 진술을 받아 그 진술에 동의하거나 보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발화의 참조자(이 경우 사과)는 이 언어 게임에서 스스로 진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수행적인 발화는 다른 규칙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발화에 의해 생성된 새로운 맥락 속에 즉각 배치되는 수신인에 있어 논의나 검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화자는 물론 다양한 언어 외적 상황을 통해 수행적인 발화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결혼 서약에서 "I do."는 적당한 사람이 적절한 상대에게 하지 않는 한 수행적인 힘을 갖지 않는다. "I do"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힘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그러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1990년대 트랜스젠더 연구의 출현은 그러한 변화의 순간이었는데, 물질적인 조건의 변화와 무관해 보이나 긴밀하게 연관된 사회정치적 액티비즘이 새로운 수행적인 발화, 전례 없는 말하기, 예상치 못한 언어 게임,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젠더 위치의 이질적인 분출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함께 작동했다. 이전까지, 트랜스젠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다른 발신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언어 게임에서 참조자 역할을 강요받았고, 이는 그들이 자신을 정신병동으로 이송하는 의학적 지식의 대상이자, 재판에 제출되는 경찰 보고서의 주체였음을 뜻한다. 즉, 자유주의 국가의 보살핌을 위해 투쟁하는 페미니스트와 게이 해방 전선 담론의 발화에서 그들은 더럽고 보잘것없는 소외된 자들이었다. 심리치료사가 외과의사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동안 변호사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스스로 대표해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눈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그마저도 어쩌다 출판되는 자서전의 지면이나 프릭 쇼의 그늘에서의 일이었다. 이는 트랜스젠더들 사이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 실제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기반한 비판적이고 문화적인 작업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나 이는 더 넓은 사회에서는 거의 가시화되지 못했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과 그들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주변화 된 대화에 참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에 어떤 일이 일어났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어렵다. 인과관계는 언제나 골치 아픈 개념이다. 달력이 넘겨지기 시작했고, 세계 질서는 붕괴했으며, 유행성 바이러스는 우리가 섹슈얼리티, 정체성, 공공 영역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켰고, 기존의 단어는 사회운동을 동원하기 위한 새로운 의미에 투여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인식의 균열에 의해 부서진 문화적 풍경 위에서 충돌했다. 그 잔해 속에서, 트랜스젠더들은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트랜스젠더 현상에 관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발화자의 위치에 서고자 싸웠고, 복수심에 찬 우리의 목소리로 주장했고, 우리가 누구인지 말했으며, 담론을 표출했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이에 뒤따른 대화의 한 기록이다. 

 

 

(탈)종속된 지식

 

"트랜스젠더 현상 연구the study of transgender phenomena"와 "트랜스젠더 연구transgender studies" 사이의 유용한 용어 구분은 트랜스젠더 현상을 이해하는 근대적/포스트모던적 인식론적 맥락 사이의 균열, 각각의 맥락에 관련된 다양한 유형의 언어 게임, 그리고 각각의 기획을 특징짓는 상이한 비판적 실천들을 통해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 후술 하겠지만, "트랜스젠더 현상 연구"는 유럽을 기원으로 하는 문화에서 오래된, 그리고 계속 진행 중인 기획이다. 반면 트랜스젠더 연구는 지난 십여 년 동안 형성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비판적인 기획이다. 이는 새로이 등장한, 지식 생산을 위한 "포스트모던의 조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인식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으로도 혁신적이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트랜스젠더 현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관련된 주제에 관한 서술적인 지식을 주장하는 발화 주체의 체현된(embodied) 경험을 적당한(심지어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하며, 이는 경험적인 지식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타당하며, 아마도 더욱 "객관적인" 지식의 형태이고, 실은 분석되는 상황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이는 "트랜스젠더 존재"의 주관적인 지식이 외부적 위치에서 얻은 트랜스젠더 현상에 대한 지식보다 어떻게든 더욱 가치 있다는 주장과 같지는 않으며, 오히려 대화에 있어서 그 어떤 목소리도 거짓된 보편성이나 권위를 주장하면서 발화의 위치가 갖는 특이성과 특수성을 은폐하는 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체현과 위치성을 문제시하는 이러한 비판적인 관심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성장하고 있는 간학제적인 학술적 연구 영역에 트랜스젠더 연구를 위치시킨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문화적으로 이해 가능한 구조로서의 신체를 뜻하는 몸(soma)과 신체가 변형되고 배치되는 데 동원되는 기술(techne)이 실은 불가분 하게 상호 관통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는 "신체"가 하나의 (이미 구성된)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지식과 앎에 있어서 불확실한 지반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너무 흔한 비판적 실패를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불확실한 지식이나 행동이 다른 신체의 배치나 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하는 데 종종 실패한다는 점을 다루면서, 트랜스젠더 연구는 체현된 인간 의식의 고유한 상황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귀중한 기여를 한다. 

  방법론적으로, 트랜스젠더 연구는 미셸 푸코가 "종속된 지식의 반란"이라고 불렀던 것의 예가 된다. "종속된 지식"에 대해, 푸코는 지식의 두 가지 상이한 유형을 의미화했다. 첫째, 그는 "기능적 일관성 혹은 형식적 체계화에 가려지거나 묻혀 온 역사적 내용"을 뜻했다. 그가 기술하기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신병동이나 감옥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분명 정신병동 안의 삶의 기호학이나 일탈 사회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실제 역사적 내용의 출현에 의해서였다. 아주 간단하게, 역사적 내용만으로도 기능적 배치나 체계적 조직이 감추기 위해 고안한 구분선이나 대립과 투쟁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속된 지식은 기능적이고 체계적인 앙상블에 존재했으나, 은폐되었던 역사적 지식의 블록이며, 비판은 학문의 도구를 활용하여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학문의 전통적인 도구를 통해 아카이브로부터 발굴되어야 할, 그리고 현재의 학문적 논쟁을 통해 재맥락화 되어야 할 이런 종류의 역사적 내용(비-유럽권 젠더 체계에 관한 민속지학에 파묻혀 있는 기록, 판례법의 일부 불명확한 간행물에 숨겨진 법적 절차의 기록, 정신질환 환자의 진료기록 등)을 바탕으로 한다. 푸코의 말을 따르자면, 이러한 지식을 복원하고, 또 먼저 어디를 들춰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꼼꼼함, 엄밀함, 기술적인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트랜스젠더 연구"를 학계의 단지 "트랜스젠더 공동체"의 일부만이 아니라 학계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이와 같은 학문적 도구를 활용하고, 학술적 담론에 능통한 전문가의 기술적 능력이다(물론 커뮤니티와 학문 영역 간의 관계는 지적 활력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푸코가 말한 다른 종류의 "종속된 지식"은 공동체 참여의 정치를 일컬으며 트랜스젠더 연구의 방법론에서 핵심이기도 하다. 푸코가 "비개념적 지식으로 실격된 일련의 모든 지식으로서, 충분히 정교화되지 않은 지식, 입증되지 않은 지식, 위계적으로 열등한 지식, 학식이나 과학성의 수준에 미달한 지식"으로 묘사한 것은 학문적으로 훈련받았건 아니건 트랜스젠더들이 그들의 체현된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담론과 제도와의 관계를 통해 갖게 된 바로 그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은 직접적인 경험에서 표현될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을 통해 윤리적인 방식으로 증언되거나 재현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푸코는 "묵혀져 왔거나, 심지어 주변에 머물렀던" 정신질환자나 일탈자의 지식과 같은  "독특한 지역적 지식"이 "아래에서부터" 다시 등장하는 것은 현대의 비판적인 질문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로 다르게 보이는 지식의 두 가지 형태, 즉 "학문의 특화된 영역"과 "학식과 과학의 위계에 의해 실격된 지식"이 하나의 용어로 묶이는 것이 일견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푸코에게 있어 담론적 비판의 근본적인 힘은 명백히 그 계보학적 결합에 있다. 학문적 지식과 실격된 "앎" 양자는 모두 현재의 권력 구조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탈환한다. 하나가 "투쟁에 대한 꼼꼼한 재발견"을 제공한다면, 다른 하나는 "투쟁의 생생한 언어"를 보존한다. 이전 시기까지 주변화되어 있던 젠더화 된 주체성과 섹스화 된 체현에 대한 지식의 형태를 탈종속화하면서 트랜스젠더 연구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개입을 약속한다. 

  

다시 서술하기

 

푸코의 방대한 철학적-역사적 연구 기획은 우리가 오늘날 트랜스젠더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작업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이어져 온 서구 문화가 선취했던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성애, 남녀한몸증(hermaphroditism), 젠더 도착(gender inversion), 그리고 "사회적 흉물스러움"의 다른 형태들에 대한 규제는 "정상화 정권(regimes of normalization)"이 발전하는 현저한 표시였고, 그 후손은 훗날 근대 시기까지도 분명히 활발하고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이 주목할만한 지적 유산을 다시 서술한다. 이는 전경과 배경이 젖혀지고 뒤바뀌는 듯 보이는 해체적인 순간으로서 "트랜스젠더 효과"에 주목하며, 예기치 않았던 젠더 현상의 광경은 깜짝 놀랄 새로운 방식으로 젠더 규범성이 만들어지는 것을 조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분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적어도 19세기 이후, 트랜스젠더 현상은 성과학, 정신의학, 내분비학 및 사회 규제적 실천을 포함하는 의과학적 분야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사회 질서를 교란해 왔다. 특히 트랜스젠더 현상과 관련된 임상 문헌은 수천 권에 이르며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빅토리아 시기 사회적 일탈의 분류학자였던 리차드 폰 크라프트-에빙과 같은 인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이 참고문헌의 초기 항목은 막스 마르쿠제의 "성적 변환 충동drive for sexual transformation"과 같이 "정반대의 성적 느낌contrary sexual feelings"을 서술한 카를 폰 베스트팔은 물론 마그누스 힐쉬펠트의 "성적 중간자sexual intermediaries", 해브록 엘리스의 "이오니스트eonists"를 포함한다. 20세기 초, 우리는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자들을 만나면서 오늘날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친숙해졌다. 지난 세기 중반에 이르러, "성별 위화감gender dysphoria"에 대한 전문 의학 문헌이 해리 벤자민과 그의 동료 로버트 스톨러, 리차드 그린, 존 머니의 연구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는데, 미국정신의학회(APA)가 1980년에 공식적인 정신병리학적 용어로 "젠더 정체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를 새롭게 정의된 임상적 실체로 공식적으로 정의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트랜스젠더 연구는 이제 이 임상적 작업의 방대한 자료를 아카이브로 접근하는 위치에 있다.

  임상 아카이브와 나란히 놓인 것은 수세기에 걸쳐 [임상 아카이브와 같이] 경험적 연구로서 축적된 방대한 민속지학으로서 이는 탐험과 교역, 정복과 식민화를 통해 전 세계에서 마주친 문화에 대한 유럽의 관점을 문서화한 것이다. 이 문헌들은 상이한 시간과 장소에서 구성되는 신체적인 성(sex), 주관적인 젠더 정체성, 사회적인 젠더 역할, 성적 행동, 친족 지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럽적인 환상(약간의 유럽중심적인 불안 그 이상으로)이 끊임없이 지속됨을 사회과학 분야의 해석을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인들의 착취 초기 설명을 채우는 신비로운 무제라도(mujerados)나 모르포다이트(morphodites)는 단지(혹은 아마도 실제로) 유럽인들의 집단 학살 관행에 의해 "제3의 성"의 일원으로 사라지거나 억압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유럽적인 상상에 의해 구축된 일탈적 인격체의 범주이며, 총체적으로 급진적인 문화적 타자성을 파악하려는 보다 체계적인 유럽의 실패를 응축하고 포함하는 (그리하여 한계를 정하는) 불가사의한 힘에 투자된다. 지난 오백여 년간 유럽중심적인 문화는 세계 각지의 고유한 문화에서 추려낸 이국적인 젠더 행렬을 전시해 왔는데, 인도의 히즈라(hijra), 폴리네시아의 마후(mahu), 태국의 카토이(kathoey), 브라질의 트라베스티(travesti), 아라비아의 한에스(xanith), 아메리카 원주민의 베르다쉬(berdache) 등 수도 없다. "트랜스젠더"는 국내외에서 이 동물원에 추가된 최신의 표본인 셈이다.

  젠더 변이의 다양한 유형을 "트랜스젠더"라는 단일한 용어로 결합하는 것은 (특히 서구와 나머지 세계를 나누는 경계를 넘어설 때 이것이 하나의 인격 유형으로 붕괴될 때) 위험과 약속 모두를 담보한다. 이는 너무나 쉽게 비서구적 인격의 구성을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서구적 구축 방식에 동화시키는 것으로 식민주의의 권력 구조를 반복하는 방식이다. "트랜스젠더"는 의심의 여지 없이 현재 제3세계 소비를 위해 수출되고 있는 제1세계 원산지의 범주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럽 중심적 특권으로 전 지구를 순환하는 "트랜스젠더 이론"과 유럽 중심적인 맥락에서 주변화 된 젠더를 구성하는 성원이 속한 다양한 비유럽권, 식민지 출신,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교류가 전적으로 새로운 장르의 분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만남은 트랜스젠더 연구의 지리적, 담론적, 문화적 경계를 표시하는데, 이 분야가 영어권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발전하였으나 미개척된 잠재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 독본에 어떤 글을 실을지 기준을 정하면서, 스티븐 위틀과 나는 성과학과 페미니즘의 중요한 초기 작업 몇몇을 강조하기로 결정했고,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트랜스젠더"라는 용어에 명시적으로 관여하는 영어 연구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우리는 "퀴어 젠더queer gender" 논쟁과 최근 관심이 높아지는 여성-신체의 남성성 연구, 자아의 형성 뿐만 아니라 젠더 정체성 정치의 "경계 전쟁"을 탐색하는 연구, 윤리와 도덕, 체현에 대한 연구에 대한 핵심적인 논문을 제공한다. 우리는 "전 세계의 80가지 젠더들"과 같이 젠더 다양성 실천과 정체성에 관한 전 지구적인 조사를 시도하는 데 저항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트랜스젠더 현상의 지구적 범위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존재하는 많은 선집이 이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결정의 불행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멕시코시티와 브라질에서의 남성-신체의 젠더 다양성에 관한 돈 쿨리크와 아니크 프리에르의 연구, 아르헨티나에서 마우로 카브랄이 실시한 격정적인 시적, 간학제적 연구, 동남 아시아의 젠더에 관한 수많은 연구 등 지역적 초점을 갖고 있는 많은 중요한 연구들을 빠트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신 우리는 "트랜스젠더"가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어 왔는지, 그리고 인종, 계급, 그리고 장소성이 어떻게 그 용어의 전파를 복잡하게 했는지에 대해 탐색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이 독본에 포함된 연구의 문화적이고 인종적인 다양성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편집 상의 선택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트랜스젠더 연구의 학문적 영역에서 연구자들의 압도적인(그리고 일반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백인성에 놀랄 따름이었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학계의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환경에서 유색인종이 일하는 것을 막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 때문이며, 또한 상이한 인종적, 민족적, 언어적, 사회경제적 공동체 사이에 "트랜스젠더" 용어가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색인종의 기여가 상대적으로 부족함에 따라 트랜스젠더 연구에서 등장한 젠더 다양성을 이해하는 분석적 틀이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긴 하나) 결핍되었다고, 따라서 인종, 민족, 트랜스젠더 현상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궁극적으로 재현하기에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러한 논의는 우리가 앞으로 더욱 생산적이고 광범위하게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트랜스젠더 현상이 유럽 문화의 전체 기획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명하게 주목한다. 그들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드러남과 지워짐, 존재와 부재에 따른 그들의 다층적이고 모순적인 상태는 규범을 만들고, 차이에 결과를 부여하며, 지배적인 문화의 공간을 구축하는 사회적 힘의 작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종, 장소성, 계급의 차이 뿐만 아니라 젠더 차이에 더욱 잘 조응하는 트랜스젠더 연구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를 만드는 데 더 나은 시각을 제공할 것이며, 현대의 그 모든 복잡성 안의 (포스트)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다시 독해하는 강력한 힘을 제공한다. 

 

 


 

* 오역과 오탈자, 현재는 빠져 있는 각주는 차차 수정하여 보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