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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도대체 누구의 페미니즘인가? - Emi Koyama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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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도대체 누구의 페미니즘인가? - Emi Koyama

플루키 2019. 4. 21. 17:53

도대체 누구의 페미니즘인가?

: 트랜스젠더 포용에 관한 논쟁에서의 말해지지 않은 인종 차별주의

 

I

 

  나는 “미시간” 상황(예컨대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에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논쟁)에 대한 진흙탕 레슬링에 참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최근 수개월 사이 “여성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백인 중산층 여성과 트랜스 운동을 이끄는 백인 중산층 트랜스 활동가 사이의 “논쟁” 양상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이 모든 논쟁이 딛고 서있는 말해지지 않는 인종 차별주의에 대해 도전해야 할 시간이다.

  이러한 논란은 1991년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의 주최 측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캠프장 혹은 “랜드(The Land)”에서 내쫓고, 축제가 오직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에게만 열려있다면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그 범주에서 배제하면서 분출했다. 다음 해에 소규모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은 이러한 방침에 항의하기 위해 축제장 입구에 집결했다. <트랜스 자매들: 트랜스젠더 페미니즘(TransSisters: The Journal of Transsexual Feminism)>의 편집자인 데비나 앤 가브리엘(Daviana Anne Gabriel)에 따르면 “(항의) 성명의 처음 의도는 주최 측을 설득해서 수술 한(그러나 수술하지 않은 자는 아닌) MTF 트랜스젠더가 축제에 입장할 수 있도록 방침을 바꾸는 것이었다.” 가브리엘과 다른 사람들이 1992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근거해 그들은 축제 참가자의 대부분이 이러한 방침 변경을 지지하는 반면 “수술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포용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의 이러한 논쟁은 1994년에 명백히 확대되었는데, 위 항의가 “트랜스 캠프”라고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GenderPAC의 상임이사인 리키 앤 윌킨스(Riki Anne Wilchins)는 “첫 번째 캠프 트랜스에서의 논쟁이 단지 우리를 진짜 여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축제 측과 우리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논쟁은 캠프 내에서 수술하지 않은 트랜스젠더가 진짜 여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수술 한 트랜스젠더 사이에서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윌킨스는 “평범한 삶을 여성으로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포용할 것을 주장했고, 여기에는 FTM 트랜스 집단과 많은 수의 “수술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포함되었다. 혹은, 가브리엘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윌킨스는 “우리(수술 한 트랜스젠더 여성)가 수술 하지 않은 (MTF) 트랜스젠더의 지위를 옹호하도록 압박하면서” 축제에 대한 항의에 “매진해야 한다”는 “결연한 노력”을 내보였다. 가브리엘은 윌킨스가 대표하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녀가 “혐오감에 빠져 있는 ‘트랜스젠더 운동’에서 발을 뺏다”고 전했다.

  1994년에 창립된 이래로 몇 년 동안 GenderPAC과 그 상임 이사인 윌킨스는 트랜스 운동에서 지배적인 목소리를 냈다. 조앤 로버츠(JoAnn Roberts)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앙숙인 다양한 분파가 모여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의견의 차이를 제쳐두었다”고 조직 구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GenderPAC의 상당수 초기 지지자들은 가브리엘처럼 윌킨스가 초점을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에서 성차별주의나 이성애중심주의를 포함한 젠더에 기반한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옮겨간 데에 비판적이었다. 반대자들은 분명히 트랜스 집단의 권리를 위한 대안적인 정치 조직을 설립했다. 마찬가지로 가브리엘을 포함한 다섯 명의 트랜스젠더 여성은 2000년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가 열리기 단 며칠 전에 발표한 공동 성명서에서 축제 주최 측과 윌킨스 모두를 “지지할 수 없고, 반페미니즘적이며,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 여성 모두에게 전적으로 억압적”이라고 비판했다. 윌킨스의 전술은 너무 적대적이고, 대립적이며 여성에게 경멸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남성 성기는 남성 권력과 성적 지배의 상징일 수 있기 때문에 축제에 그것이 있는 것이 부적절”하기 때문에 “남성 성기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공간에 함께 모일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는” 비트랜스젠더와 “수술한” 트랜스젠더 여성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성 성기를 지니고 축제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공격하고 억압할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수술 한/노 페니스(no-penis)’ 방침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성명문의 저자들도 인정했다. “이러한 방침은 인종과 계급의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데, 특히 적절한 성 전환 수술을 할 수 없는 여성, 특히 유색인종 여성을 배제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가장 훌륭하고 공정한 방침”이라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방침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포용하는 것과 여성의 문화를 보전하고 안전한 여성의 공간을 갖고자 하는 정당한 우려” 사이의 균형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종 차별주의와 계급 차별에 대해 염려하는 체하지만 이를 그들이 마주할 것을 알고 있었을 비판에 대한 선제적인 방패로 활용하면서 명백히 스스로 위배된다.

윌킨스의 젠더 해방 철학에 관해 그들은 “모든 사람의 젠더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다”는 지점에서 동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페미니스트로서” 윌킨스처럼 “여성들의 자매애의 사랑과 창조성을 경쟁적인 목적으로 이끄는 시도를 하는 자에게 분개한다.” 양상은 분명하다. 그들이 “페미니즘”이나 “자매애”를 말할 때 “여성다움에 대한 찬사”는 여타의 문제(예컨대 급진적 평등, 경제적 정의와 젠더 표현의 자유)를 제치고 중요성을 갖는다.

  성명문에 서명한 사람 중 하나인 제시카 자비어(Jessica Xavier)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아갈 안전한 공간을 원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다른 자매들의 품에서 위안을 찾고, 여성들의 문화와 음악을 다른 축제 참가자들과 함께 축하하기를 원한다.” 노동자 계급 그리고/혹은 비백인 “자매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최소한 그녀가 그러했던 것만큼이라도 필요하다는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긴 했을까?

 

 

II

 

  비록 급진적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음악가로서 처음 공개적으로 공연한 것은 맥신 펠드만(Maxine Feldman)이었지만, 1973년 엘릭스 돕킨(Alix Dobkin)이 발매한 <라벤더 제인은 여자를 좋아해>라는 앨범의 성공은 “여성 음악”의 독특한 문화의 출범에 일조했고, “그러한 문화산업에 광범위한 청자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돕킨은 그녀의 데뷔 엘범에 대한 표지에서 내 음악은 여성이 경험하는 여성에서 비롯되었고 그에 속한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다이크 민족이여 영원하라! 여성에게 힘을!”이라고 외쳤다.

  여성 음악 문화에서 트랜스 포용/배제에 관한 역사는 여성 음악 문화 그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1960년대 히피족을 모델로 한 대규모 정치적 여성 음악 축제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한 “여성 음악의 선도자” 올리비아 레코드사는 1973년에 설립되었다. 올리비아 레코드사가 MTF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으로 드러난 레코드 기술자를 해고하는 것을 거부한 것을 두고 엄청난 공격이 쏟아진 것은 겨우 삼 년이 뒤의 일이었다. 특히 이 기술자를 지배적인 남성으료 묘사한 제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의 1979년 작 <트랜스젠더 제국: 쉬메일의 형성(The Transsexual Empire: The Making of the She-Male)>이 발표된 이후 일련의 “증오 편지, 폭행 협박, 살해 위협”이 급증했고, 결국 그녀는 단체를 떠나야만 했다.

  여성 전용 공간에 트랜스젠더 여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반대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성 특권을 가지고 자랐다는 사실로 인해 다른 모든 여성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근거로 표면상 정당화된다. 소년이나 남성이었던 그들의 과거로 인해 그들은 다른 여성들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안전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급진 페미니즘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단지 소수의 범죄자에 의한 개별 행위가 아니라 남성 지배와 이성애중심주의에 따른 사회적 강제라고 보았을 때, 안전에 대한 여성의 염려에는 논의의 여지가 거의 없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의 페미니스트 전쟁을 위한 모멘텀을 건설하려 했던 상황에서 “모든 트랜스젠더는 여성을 일개 인공물로 격하하면서 여성의 신체를 강간한다”는 제니스 레이몬드의 악의적인 주장이 얼마나 유효했는지 놀랄 필요도 없다.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 방침의 수호자들은 진정으로 여성 운동과 문화를 가치 있게 여기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면 랜드에 입장을 자제함으로써 축제의 방침을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의 오너인 리사 보겔(Lisa Vogel)은 “많은 유색인종 여성이 ‘숨 쉴 공간’의 필요성을 표방하면서 백인 주류와의 관계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종 차별주의로부터 떨어진 공간을 확보한 것처럼,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은 똑같이 ‘숨 쉴 공간’을 필요로 하고 이를 가치 있게 여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의 정확한 양상은 레즈비언과 (또는) 페미니스트 저작에서 매우 일반적인데, 그들이 백인 여성으로서 유색인종 여성의 공간을 얼마나 존중하며,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을 위해 이와 같이 해야 하는지에 관한 언급으로 마무리된다. 예컨대 <레즈비언 커넥션(Lesbian Connection)>지의 한 독자는 “나는 유색인종 여성만을 위해 계획된 워크샵과 공간을 존중하도록 다른 백인 축제 참가자들을 교육하는 데에 수년을 보냈다. … ‘진보적인’ 사람들이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을 위한 신성한 공간에서 열리는 행사를 공격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레즈비언 커넥션>지의 또 다른 독자는 이러한 논리에 반대하면서 전체 축제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는 대신 “만약 질을 지니고 태어난 여성이 그들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면, 왜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는 유색인종 여성에게 전용 공간을 제공했던 것처럼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만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물론 주최 측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고 기꺼이 주장하겠지만 여성 축제에서 여성 전체 집단을 배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의 또 다른 결점은 “유색인종 전용” 공간이 일반적으로 백인처럼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가진 유색인종 여성 또한 환영한다는 데에 있다. 백인 특권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인 창백한 피부의 “유색인종 여성”이 포용되어야 한다는 데에 논의의 여지가 없다면, 왜 소년이나 남자 같은 여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가?

  가장 단순한 형태의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이 인종, 계급, 국적이나 다른 요소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적 불평등 가운데 가장 지배적이고, 극단적이며 근본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오직 이러한 전제 하에서만 트랜스젠더 여성이 갖는다고 여겨지는 특권(예컨대 남성 특권)은 다른 특권들(이를테면 백인이거나 중산층인 것)보다 위험하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의 순위나 단순한 정체성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층적인 정체성(예컨대 유색인종 여성)이나 혼종적인 정체성(예컨대 혼혈인 사람들)으로 인해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억압적이다. 체리 모라가(Cherríe Moraga)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나라에서 레즈비어니즘은 가난이다. 황인종인 것처럼, 여성인 것처럼, 그저 가난할 뿐이다. 억압을 순위매기는 데에 위험이 있다. 억압의 구체성을 인지하기를 실패하는 데에 위험이 있다.” 강간이 역사적으로 흑인 커뮤니티를 공격하는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수잔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er)나 “남성다움에 대한 숭배”나 “갱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히스패닉 커뮤니티에 대한 대중적인 스테레오타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은 이러한 위험을 잘 보여준다.

  흑인 레즈비언 집단인 컴바히 강 집단(Combahee River Collective)은 1977년에 발표한 유명한 성명에서 페미니스트 정체성 정치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지만, 우리는 진보적인 흑인 남성과 연대감을 느끼며 분리주의적인 요구를 하는 백인 여성의 분열을 옹호하지 않는다. … 우리는 우리와 양립 가능한 정치적 분석이나 전략이 아니라는 점에서 레즈비언 분리주의 입장을 거부한다.” 이는 단지 백인 급진 페미니스트가 인종 차별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급진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깔린 일련의 가정(예컨대 여성 억압은 가장 지배적이고 근본적이다)은 “그 지위가 우선적이거나 유일한 정체성으로 두드러지는 사람들”의 특권화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유색인종 여성이 벌여온 수십 년 간의 항의는 인종 차별적인 페미니스트의 오만함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을 교육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엘릭스 돕킨은 1998년에 “새로운 세대의 ‘레즈비언’과 ‘다이크’를 대립시키는 새로운 공포 전술이 필수적이었다. … 우리를 나자빠트리는 데에 실패하자 그들은 ‘인종 차별주의’를 시도했다.”

  다시 말해 돕킨은 가부장제와 공모하는 유색인종 여성을 효과적으로 비난하면서 유색인종 여성의 정당한 염려가 아니라 레즈비언을 “파괴하려는” 가부장제의 시도에 인종 차별주의의 혐의를 돌렸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인종 차별적인 페미니즘 뒤에 어떤 이론이 있는가?”하고 묻는다. 그는 “많은 백은 여성은 진짜 차이를 무시하는 데에 많은 투자를 한다,” 왜냐하면 “유색인종 여성에게 고정관념을 탈피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 오직 섹스(sex)라는 관점에서만 억압을 바라보는 이 여성들의 자기만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고 쓴다.

 

 

III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것이 페미니즘을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오래되고 평범한 공포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끊임없는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는 억압적이고 배제적인 행동을 하는 그 어떤 집단보다도 트랜스 혐오적인 페미니스트에게 더욱 커다란 의문의 이익을 주었다고 고백하며, 또한 트랜스젠더에게 적대적인 문화를 지속하는 데에 나의 행동하지 않음과 침묵을 지키는 자기만족이 기여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얄궂게도 2000년에 엘릭스 돕킨과 몇몇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허스토리(herstory)”를 공유하는 패널 발표에서 찾아왔다. 발표장은 40대 이상의 여성들로 가득했고 그들 대부분은 백인 중산층으로 보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발표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나는 겁에 질려 있었는데, 두려움과 좌절의 단계는 저녁이 진행되면서 점차 누적되었다.

  발표는 모두 성가신 트랜스젠더, 사도마조히즘 종사자 및 성적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자유로웠던 1970년대에 여성 커뮤니티가 얼마나 훌륭했는지(혹은 그들이 생각하기에)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모두가 서로를 믿었고, 인종과 상관없이 몹시 안전하다고 느꼈다”는 말에 발표장을 가득 메우는 백인 여성들의 박수소리와 얼마나 그녀가 백인 여성으로서 유색인종 여성의 존재에서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를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고, 구역질이 났다. 또 다른 여성은 그녀가 자주 다니던 여성 전용 술집은 잠재적 침입자를 감시하는 계단이 문 앞에 길게 있었던 것이 얼마나 훌륭했는지에 대해 떠들었고, 나는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페미니스트나 레즈비언 모임에서 이토록 고립되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한 흑인 여성이 일어서서 그녀가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을 때가 압권이었다. 마치 이 불편한 순간을 그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고 재빨리 지나가려고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발표장 전체는 고요해졌다. 거북한 압박을 느낀 그 흑인 여성은 “그러나 인종 차별주의와 계급 차별에 관한 논의를 계속 이어온 것도 레즈비언들이었다”고 덧붙였고, 백인 여성들로부터 커다란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논의를 지속한 건 유색인종과 노동 계급 레즈비언들이었고, 너희 백인 중산층 레즈비언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지는 수십 년 동안 그렇게 기회가 있었지만, 분명히 많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여성의” 커뮤니티에 트랜스젠더가 들어오는 데에 저항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들이 유색인종, 노동 계급, 장애를 가진 여성 등의 광범위한 기여에 대해 어떤 것도 배우지 않았다. 단지 유색인종 여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종 차별주의를 행동에 옮기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러한 동력을 위지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드리 로드가 대단히 웅변적으로 비난한 인종 차별적인 페미니즘은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그들이 실제로 변화하기를 원할지라도, 여성 공동체 내에서 트랜스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그들의 억압적인 행동을 상당한 정도로 변화시키리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억압이 지속되는 것은 정보나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이는 페미니즘적인 연민과 양심, 원칙 같은 것의 결핍이다.

  유색인종 레즈비언의 전통과 관점에서 말하자면,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려는 모든 이유는 단지 트랜스 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인종 차별적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랜드에 들어가서 안 된다는 주장은 다른 모든 여성의 경험이 똑같다고 가정하며, 이는 인종 차별적인 가정이다. 모든 여성이 동등하게 특권을 갖거나 억압받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트랜스젠더 여성이 어느 정도 남성 특권을 경험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우리 커뮤니티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장벽이 되지 않는다. 랜드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암시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여성들이 서로에 대해 억압과 폭력을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다. 심지어 “남성 성기의 존재가 논쟁의 원인”이라는 주장 또한 흰 피부가 남성 성기만큼이나 폭력을 상기시킨다는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인종 차별적인 역사는 우리에게 한 억압에 대해 변명을 하는 백인 여성들이 인종 차별주의, 계급 차별, 장애 차별과 같은 다른 억압에도 같은 변명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IV

 

  앞서 논의한 것처럼, 많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유색인종 여성 전용” 공간을 유지하려는 유색인종 여성의 요구를 그들이 얼마나 존중하는지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을 존중하는 것은 반 인종 차별주의에 헌신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전자는 인종 차별주의와 싸울 책임을 백인 여성에서 유색인종 여성으로 치환하는 반면 후자는 그들의 특권과 인종 차별적인 각인에 직면하도록 강제한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유색인종 여성이 왜 그들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 정말 이해하고 있을까? 그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인종 차별주의에 관한 백인 페미니스트의 좋은 저작이 부족한 관계로 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메리 데일리(Mary Daly)에게 보내는 유명한 편지에서 오드레 로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이 비유럽인 여성을 다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직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만 그러하다.” 유색인종에 관한 백인 여성의 글쓰기는 자주 “다양한 가부장제의 도구들”과 “그러한 도구들이 얼마나 여성들에 의해 서로에 대한 인식 없이 쓰여 왔는지”에 대한 시각을 잃는다. 많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이 유색인종 여성을 옹호하는 체하고자 유색인종 여성에게 해를 입히는 백인 남성의 인종 차별주의(빈곤, 성매매, 포르노그래피 등을 통한)를 기꺼이 인정하지만, 이는 자주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활용된다. 따라서 유색인종 여성 전용 공간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모순을 마주하지 않은 채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적인 수사를 채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 페니스” 방침을 지지하는 성명을 쓴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한 문장에서 인종 차별주의와 계급 차별에 대한 염려를 표한 다음 인종 차별적이고 계급주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의 모순을 보지 않는다.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처럼 이들 트랜스젠더 여성은 인종 차별주의와 계급 차별에 맞설 그들의 책임을 면하는 것을 완전히 정당하게 여기며, 이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 방침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이를 수용 가능한 페미니스트 입장으로 여기는 정치적으로 보다 지각 있는 일부 트랜스 활동가들이다. 가령 케이트 번스타인(Kate Bornstein)은 “레즈비언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배제”는 레즈비언들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자원”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억압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어떤 결과가 바람직하거나 가능할지를 명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상호 존중하는 대화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사적인 대화에서 또 다른 트랜스젠더 여성은 내게 트랜스젠더인 척하는 남성 참가자로 여겨질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랜드에서 배제되는 편이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페미니즘적인 좋은 의도에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유색인종과 노동 계급 여성에 대한 백인 중산층 여성의 억압이 경시되거나 용인되는 환경을 지지하고 강화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만 한다. 나는 어떤 여성이 더 특권적인 여성을 위해 침묵하고 희생한다면 그건 절대 페미니즘적인 것이 아니라고 일깨워야 한다.

 

V

 

  백인 중산층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은 그들이 다른 여성과 같아서 랜드의 다른 여성에게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백인 중산층 레즈비언들에게 너무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우리는 당신의 자매다”는 그들의 전형적인 간청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정서를 반복한다. 한 여성은 “지역 트랜스 커뮤니티와 관련된 레즈비언으로서, 나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이 (MTF) 트랜스젠더에게 어떤 위협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 트랜스젠더 여성이 다른 여성과 “똑같다”거나 그들의 개방적인 포용이 그 어떤 위협도 안 될 것이라는 가장을 그만두어야 할 때이다. 트랜스젠더의 존재 여부는 정치적으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젠더를 본질화 하고, 양극화 하고, 이분화 하는 세계에서는 대단히 위협적이며,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와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이에 대한 면역성이 없다.

  내가 말하고 있는 위협의 종류는 분명히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이는 양성애와 범성애 정치학이 현재 게이 정체성 정치에, 다인종 혼혈인들이 흑인 민족주의에 보였던 것과 같은 종류의 위협이다. 트랜스젠더 존재가 본질주의의 구성성을 폭로하면서 어떻게 젠더의 본질주의적인 정의를 탈안정화 하는지 그 변혁적 잠재력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여성 커뮤니티”에서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백인 중산층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에게 특히 위협적인 까닭은 이들이 정체성과 정치학의 근원으로서 몸이 가지는 비현실성을 폭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의 보편적인 경험과 억압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폭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러한 유효한 비판은 유색인종 여성과 중산층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통적으로 백인 중산층 여성들은 돕킨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이 여성 억압을 하찮게 만들고 페미니즘을 좌절시키려는 가부장제의 시도라며 일축했다. 트랜스젠더 포용에 관한 문제는 그들을 정치적 제휴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여성과 비트랜스젠더 여성 사이의 보편적인 차이로서 염색체와 같은 터무니없는 신체 요소에 대한 신뢰성을 지켜내야 하는 위치로, 수많은 기이한 모순으로 가득 찬 터무니없는 입장으로 몰아세웠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본능적으로 이를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여성과 “똑같은” 척하면서, 그들은 성차별주의와의 투쟁이 지속되기 위해 모든 여타의 억압에 대해 침묵할 필요가 있다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말해지지 않는 가정과 결함을 온전히 남겨두게 된다.

  글로리아 안젤두아(Gloria Anzaldúa)의 “새로운 메스티자”와 같이, 트랜스젠더들은 남성성과 여성성 개념이 충돌하는 경계지대를 차지고 있다. “이 모순의 장소는 살기 좋은 편안한 영토는 아니다.” 그러나 이 독특한 “변화하고 다층적인 정체성과 보전”의 경계지대에서 말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가장 진정한 힘을 찾을 길이다.

  경계지대라는 비유는 트랜스젠더가 남자와 여자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점하는 공간이 실제 텍사스멕시코 경계지역이 치카노에 속하는 것처럼 자연히 그리고 마땅하게 그들의 것이라는 뜻이며, 나는 단지 그들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경계의 비자연성을 주지시키고자 함이다. 안젤두아는 “경계지대는 비자연적 경계의 정서적 잔여물로부터 만들어진 모호하고 불확실한 장소”이며 “그것은 지속적인 변화의 상태에 놓여있다. 금지된 자들은 그 거주민들”이라고 썼다. 많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성 특권의 어떤 형태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페미니즘적인 자각과 신뢰성에 대한 짐이 아니라 자산이다. 그들이 받을 수도 있었을 다른 특권을 인정하고 직면할 진실함과 양심을 제공해주는 자산 말이다.

  인종 차별주의와 페미니스트 정체성 정치에 관한 글에서 엘리엇 벳체덱(Elliott Femyne batTzedek)은 경계를 횡단하는 것이 특권과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논의한다. “이 말을 생각해 보자. ‘당신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이 말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그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신체적 폭력을 가할지 생각해 보자. … 권력을 가진 사람들인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고, 그들의 삶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 남성 권력을 보호하는 남성은 젠더를 횡단하는 것이 정확히 얼마나 위협적인지 페미니스트보다 더 분명하게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격렬하게 트랜스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는 트랜스젠더들 자신보다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그들의 결함 있는 이데올로기에 위협적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 권력은 의식적으로 이 독특한 위치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유색인종 여성들의 기여를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주변화 된 다른 여성 집단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나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권력, 특권, 억압에 관한 페미니스트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Koyama, Emi. 2006. "Whose feminism is it anyway? The unspoken racism of the trans inclusion debate." in: The Transgender Stduies Reader. 698-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