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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전

플루키 2021. 4. 17. 19:04

 

오랜만의 포스트. 올해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은 번역이다. 재작년에도 번역을 좀 해서 한 권의 책을 묶을 정도가 되었는데, 출판사와의 계약이 불발되면서 놀고 있는 원고가 많아서 아쉬운 참이었다(해당 번역의 일부는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러다 작년에 다른 책 두 권의 번역을 맡게 되었다. 물론 단독 번역은 아니고, 여러 명이서 나누어 번역을 하고 있다.

 

하나는 퀴어 코리아Queer Korea라는 선집이고, 다른 하나는 1890년대에 초판이 출간된 이후 몇 번의 개정을 거친 오래된 책으로, 동성애에 대한 근대적 관념이 채 자리잡지 않았 시기에 과학적인 탐구 방법을 통해 동성애가 죄악이나 처벌 대상이 아니라 타고난 것임을 밝혀내고자 했던 성과학자이자 의사인 해브록 엘리스Havelock Ellis(그 자신은 동성애를 하지 않았지만 결혼한 아내가 레즈비언이었던 걸로 추정됨ㅋㅋ)가 쓴 성의 역전Sexual Inversion이라는 책이다.

 

첫 번째 책에서는 군대에서 게이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분석한 인류학 논문 한 편을 번역한다. 내 석사 논문과도 관련된 글이어서 흔쾌히 번역을 맡았다. 두 번째 책은 네 명이 400여 쪽에 달하는 책을 번역하는 것이니 분량이 적지 않다. 한국어 판본은 500쪽에 달할 것 같다.

 

이 포스트를 쓰는 건 두 번째 책을 조금 소개해보려는 까닭이다. 엘리스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그가 성 역전Sexual Inversion이라고 부른 현상의 성격과 원인을 밝혀내려고 했다. 성 역전이란 건 오늘날 의미에서 동성애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개념적으로 거의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 역전자는 단지 동성에 성적으로 끌릴 뿐만 아니라 타고난 성별에 어울리지 않는 특성을 지닌 자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때 실증적인 방법이란 성 역전자로 분류된 이들의 신체적 조건, 정신질환, 가족력, 자위와 성관계 횟수와 양상, 어린 시절의 성 경험, 야한 꿈을 꾸는 횟수와 꿈에 나오는 자의 성별 등을 조사하는 것이며, 이들의 예술적인 소질이나 도덕적 태도까지도 수집되었다.

 

다만 동성애에 우호적인 의사로서 그는 이들의 욕정과 성행위를 가장 품위있는 방식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그를 통해 이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사람이며, 이들의 성행위가 특별이 더 저속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스가 수집한 사례는 이런 식으로 제시된다.

 


스물다섯 살이며 평범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사는 곳은 나고 자란 큰 마을의 어느 뒷골목이다. 하얀 피부에 호리호리하고 세련된 인상이다. 성기는 평범하게 잘 발달했고, 성욕은 강한 편이다. 그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모친은 우람하고 남성적인 여성이었다. 부친은 가냘프고 허약했다. 그에게는 일곱 명의 남자 형제와 한 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다.

 

말하기를 그는 대개 첫눈에 남자―자신보다는 나이가 많고 높은 계층의 사람이어야만 했다―에 반해서 그와 잠자리에 들고 함께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남자에 반해버리고는 애정을 쟁취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 성관계를 해도 개의치 않아 했다. 천성이 예민하고, 여성스러우며, 점잖고, 다정한 자였다. 질서 있게 정돈하는 습관이 있으며 집안일을 좋아했다. 어머니를 도와 빨래를 하는 등의 일 말이다. 그는 남자에 애착을 갖는 걸 완전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는 듯했다."

 

사례 13

 


 

"의사는 그에게 결혼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마침내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도 성적 능력이 있다는 걸 발견했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남자 성기에 대한 상상이 점점 더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불편도 극심해졌다. 건강이 무너진 것이다.

 

서른 살쯤 되었을 때, 그는 더는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자신의 성적 성향에 굴복했다. 그러고 나서는 비교적 건강의 안정 또한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열아홉 살짜리 청년과 긴밀하게 교제했다. 이들의 밀통은 대체로 감상적이었으며, 영묘화된 관능을 특징으로 했다. 이들의 성행위는 나체로 껴안고 키스하거나, 그러다가 가끔은 자기도 모르게 사정하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 서른여섯 살 즈음부터는 동성애적 성향을 거리낌 없이 따르기 시작했다. 타고난 동성애적 본능을 탐닉하기 시작하자 그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신경성 장애도 가라앉았다.

사례 18

 


"저는 런던에 사는 옛 동창을 보러 갔습니다. 그가 머무는 방에는 훤칠하게 아주 잘생긴 젊은 녀석 하나가 있었는데, 몸매가 좋았고 매력적인 태도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과거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를 잊을 수 없었죠. 솔직히 저는 그에게 반해버렸습니다. 벌거벗은 그가 제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꿈을 자주 꾸었는데, 언제나 그가 나왔어요. 그러고는 이 주 동안이나 그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모습을 담은 초상을 곁에 두고 자위를 했습니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으며 그날부터 여자는 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껏 결혼을 소망하거나 마음먹지는 않았지만, 그가 종사하는 직종에서는 결혼이 바람직한 일로 여겨졌기에 종래에는 결혼할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남자와 소년을 향한 사랑과 애정이 줄어들지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는 점 또한 확신했다.

 

어렸을 때는 스무 살에서 서른다섯 살 사이의 남자를 좋아했다. 지금은 열여섯 살 이상의 소년들을 좋아하는데, 가령 잘생기고, 체격이 잘 발달했고, 깔끔하고, 사랑스러우며, 무던한 천성이라면 좋은 신랑감이었다. 다만 그는 점잖은 사람을 좋아했다. 그는 서로 포옹하고 상호 간에 자위해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피동적인 역할로 항문성교 하기를 바랐다.

사례 20

 


그는 평생 세 명의 여자와 성교를 했으나, 그건 그저 자기가 다른 남자들처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에서였다. 그는 여자와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들을 친구로서 좋아했고, 그들이 지닌 유익함과 선함에 대해 무척이나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결코 여자와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으며, 그들과 방자하게 놀려고 들지 않았다. 그가 미혼이라는 점을 구태여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그는 배운 데 없는 자보다는 학식 있는 자를 선호했는데, 전자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는 정도가 한정되어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열여덟에서 마흔다섯까지를 좋아했지만, 많게는 예순까지도 괜찮았다. 그는 항문성교를 좋아했지만, 능동적인 쪽은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러나 펠라치오에서는 능동적인 쪽이나 피동적인 쪽 모두를 좋아했고, 허벅지로 하는 걸로도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학식 있는 자를 선호한다면서도 자신의 본능적인 충동에 관해 흥미로운 말을 했다. “관능적인 면에서는 군인과 경찰을 좋아하지만, 그들과는 할 얘기가 별로 없어서 성교가 불만족스러워져요. 저는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합니다(키가 클수록 좋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 관능적이면 좋겠어요. 그들이 제게 항문성교를 해주기를 바라고요. 거칠게 해주면 좋겠어요. 절정에 이르면 정욕에 사로잡혀 제 살을 물어뜯는 남자면 더 좋겠네요. 저는 이빨로 물어뜯기거나 하는 고통을 즐겨요.”

사례 21

 


 

언제나 저는 잘생긴 남자애들을 친구로 삼기를 선호했지만, 평범한 외모를 지닌 소년들과 사귀어 왔습니다. 그리고 다 자라 어른이 되고, 중년이 되어서도, 우리는 어린 시절의 애정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나 그래 마땅한 만큼보다도 더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했습니다.

 

공립학교의 남학생들, 그리고 편하게 살아가는 소년들은 가난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 비해 동성애적인 정욕에 확실히 더 중독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몰래 자위를 하는 건 절대 악이라는 게 제 도덕적 견해입니다. 또, 열악한 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여자들은 단지 성욕 해소를 위한 통로로 불공평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육체적인 금욕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다수 남성과 소년에게는 이미 자연스러운 우애, 상호 간의 성적 만족에 몸을 열중함으로써 비롯하는 개방적인 우애의 정신을 널리 퍼트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 반하는, 지나가 버린 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법이 아직 남아있지요. 공립학교의 모든 남자애들이 알고 있고, 많은 경우에는 행하기까지 하는 동성애 습성을 처벌하는 건 웃기지도 않는 일입니다.

사례 7

 


직업은 의사고, 결혼은 하지 않았으며, 육십 세의 잉글랜드인이다. 자신의 경우는 유전으로 인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부친은 심각한 우울증에 의한 발작에 시달렸다. 생각건대, 그의 성적 본능은 13살에서 14살 사이에 자라나 솟구쳤다. 어떠한 외부적 자극도 없었고, 주변에는 좋은 영향을 주는 것들이 많았으며, 진지하게 전력을 다해 스스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도하고, 분투했지만, 어떠한 방법도 무용지물이었다. 모든 생각, 모든 상상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죽음, 그것이 무(無)를 향한 통로에 불과할지라도 천 배는 나은 길일 것이라고 했다. 이 주제를 과학적으로 조사한다고 해서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건 없었다. 세상에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렇게도 많지만(그렇지 않은 자가 있기나 할까?), 이런 것들이 정신이상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기회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비참함과 절망의 불행한 시간을 모두 헤아릴 수 있다면 지옥을 만들고도 남을 테지요. 지금까지도 저는 어떤 기도로도, 어떤 분투로도 구원하지 못했던 이 병적인 본능과 감정에 대해 정확히 얼마만큼이나 제게 책임이 있는지 판단하지 못하겠어요. 어떤 면에서도 항상 떳떳한 자는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렇대도 사람들의 도덕성에는 사실상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고, 제게는 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흠결이 흠결로 느껴지지 않네요.”

 

사례 5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례, 기구하고 안타까운 사례가 참 많은데, 서둘러 출간할 수 있도록 애쓰는 중이다. 엘리스는 하여튼 이런 사례를 수집하고 분류하면서, 성 역전이라는 현상은 선천적인 것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론부에서는 당대 영국의 법률 체계를 비판하면서 '동의한 성인 사이의 사적인 성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 또한 펼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이기도 하다.